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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8.03.16 미국 역사기행 버지니아 (Virginia) - 1
  2. 2009.04.28 프랑스 혁명과 라피엣

미국 역사기행   버지니아 (Virginia) - 1

 

뉴욕서 4-5 일정으로 자동차 여행을 만한 곳은 북쪽으로 캐나다 퀘벡 Quebec (도깨비란 라마 때문에 인기있는), 남쪽으론 버지니아 윌리엄스버그 Williamsburg 정도 까지 일 것이다.  서쪽으로는 펜실베니아 주가 있긴 한데 특별히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장소가 떠오르지 않는다 (허쉬 Hershey파크나 아미쉬 Amish마을 정도).  동쪽은 물론 대서양이고 ( 아일랜드 끝에 몬탁 Montauk 있긴 하지만).  아직 추위가 남아있는 3월에 북쪽으로 없고 남쪽으로 차를 몰았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이 살던 집을 거쳐 포카혼타스 (Pocahontas) 동네이자 미국 최초 영국인 정착지라는 제임스 타운이 있는 버지니아의 윌리엄스버그가 목적지였다.

 

뉴욕서 조지 워싱턴이 살던 Mount Vernon 까지는 차로 시간 정도 걸리고 (242 mile, 390km) 그곳에서 제임스 타운까지는 3시간 정도 걸린다 (150 mile, 240km). 조지 워싱턴의 집은 그가 태어난 곳은 아니고 많은 (아주 많은) 미망인과 결혼한 후에 살던 집이다. 집에서 농장주로서 16년간 살다가 독립 전쟁에 나가 (1775) 전쟁을 치르고 대통령까지 지낸 22년만에 돌아와 (1797) 여생 (2) 보냈다. 날씨가 추운데도 토요일이라 그런지 집에 들어가기 위해 사람들이 줄을 있었다. 농장이니까 당연히 대지는 넓었지만 자체는 아무래도 18세기에 지어진 집이라 기대보다 작았다. 농장 입구에 세워진 visitor center 에서 기념품을 사는 사람들 표정에 초대 대통령에 대한 경외감이나 자부심 같은 것이 느껴졌다.  



사진 설명: 워싱턴 집을 구경하기 위해 줄서  모습. 오른 건물이 본관이고 정면으로 보이는 건물은 servant room 이라고 손님들을 모시고 하인들이 쓰던 건물이라고 한다. (Galaxy Note 8 으로 찍음)




Visitor center 구석에는 농장에서 일하던 흑인 노예의 생활을 보여주는 전시관도 있었다. 자유와 해방과 행복권의 추구를 내세우며 독립전쟁을 이끌었던 워싱턴의 농장에서는 300명이 넘는 노예가 있었다. 전시관에서 안내문을 열심히 읽고 있는 흑인 모녀가 눈에 들어왔다. 워싱턴은 노예들이 쉬는 시간이 없이 일하도록 독려했다고 한다. 경제학자들은 노예제도는 경제성이 낮아서 링컨의 노예 해방이 없었 어도 없어졌을 것이라고 한다. 노동 생산성이 낮아서 먹여 살리는 유지비용이 있다는 것이다. 수백명의 노예를 데리고 농사를 지어도 워싱턴은 빚을 많이 지고 있었다. 워싱턴뿐 아니라 버지니아 농장주 대부분이 영국 상인들에게 많은 빚을 지고 있었고 그런 점이 버지니아가 독립 전쟁에 참여하는 것에 일조했다고 한다.

 



사진 설명: 워싱턴이 살던 (Mount Vernon).  (Galaxy Note 8 으로 찍음)



당시 대영제국과 독립군과의 싸움은 지금으로 따지면 미국과 아프가니스탄과의 전쟁과 비슷했다. 그런 전쟁을 승리로 이끈 워싱턴은 물론 대단한 인물이다. 그러나 운도 매우 좋았다. 워싱턴의 독립군이 영국군과 정면으로 맞붙어 이긴 적이 거의 없었다. 이긴 경우는 게릴라 기습 공격에서 치고 빠지는 식이었다. 워낙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라 영국군은 인명 피해를 최소화 해서 항복을 받아내는 것이 목적이었고 독립군은 도망 다니며 식민지 사람들의 독립에 대한 꿈을 유지시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런데 미국 땅덩어리가 워낙 커서 도망 다닐 곳이 많았다. 워싱턴의 공적은 춥고 배고픈 상황에서 독립군의 해체를 막고 유지한 것이었다. 반란의 괴수로 찍힌 워싱턴은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는 입장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미국 독립 전쟁의 승리를 가능하게 했던 것은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 참전이었다.


여행 팁:

볼티모어에 가격이 좋은 게식당이 많으므로 가는 길에 들려가면 좋다.

워싱턴 DC 바로 아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에 가격에 비해 깨끗한 호텔이 많다.


 

(계속)

Posted by krkim




For Liberty and Glory: Washington, Lafayette, and Their Revolutions by James R. Gaines

 

이 책은 미국 독립 전쟁과 불란서 혁명 그리고 그 두 혁명의 주역인 조지 워싱턴과 라피옛 (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의 일생에 대한 책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ntier Lafayette 이라고 한다.  김수한무.. 삼천갑자 동방석...).   아마 저자의 의도는 라피옛 에 대하여 쓰는 것이었는데 책이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해 워싱턴의 얘기와 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라피옛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선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에 들은 로비에스 피엘이나 당통 같은 이국적 이름이나 공포 정치, 길로틴과 함께 기억하는 것이 전부였고 라피엣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내가 무식해서 잘 몰랐던 것이다.   뉴욕시에 라피옛 의 동상도 여럿 있고 라피옛 광장도 있다.   맨하탄 유니온 광장의 동상은 지나가면서 많이 봤으면서도 그의 동상인지 모르고 지나갔다.  미국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라피옛 파이엣츠 빌 등등) 도 400 개 정도 있고 라피옛 대학등 그의 이름을 딴 학교도 많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의 그에 대한 인기는 미국에서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지만 최근 프랑스 여론 조사에서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뽑혔다고 한다.

 

라피엣은 프랑스의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였는데 미국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원병으로 참전한다.  당시에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동기는 왕정 시대인 당시 최초의 자유 민주주의 시민 주권국가를 세우는 것을 돕는다는 낭만적인 이유도 있고 미국을 도와 프랑스의 적국인 영국을 패배시키고 싶은 동기도 있었고 또 이름을 날리고 싶은 명예욕도 한몫 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참전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럽에서의 경력을 과장 또는 날조해서 미군에서 높은 계급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갓 스무살 정도의 프랑스 군 대위 출신 라피옛은 일약 미군의 장군 (소장) 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높은 대우를 받은 이유는 그가 워낙 프랑스에 잘 알려진 가문의 사람이어서 그를 중용함으로서 프랑스를 독립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산도 한몫 했다고 한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당시 미 독립군이라는 것이 군복도 제대로 없는 의병 수준이어서 프랑스 정규군 장교 출신이면 대우를 해줄만도 했다.

 

라피옛 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워싱턴과 거의 부자지간 같은 우애를 쌓은 뒤 프랑스로 귀국한다.  미국에서 영웅이 된 라피엤은 프랑스에 돌아가서도 영웅 대접을 받는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독립 전쟁과 그 역사적 의미 즉 평등 사상이나 민주주의 등에 대하여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라피옛 는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넷으로부터도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돈도 빌려주고 군대도 파견했는데 그 비용 때문에 결국 자기 왕좌와 목숨을 잃게 된다.   미국 독립전쟁 이전부터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는데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느라 재정이 더 나빠져서 그걸 메우려 세금을 올리려 했다.  게다가 엎친데 덥친격으로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까지 일어나 국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 혁명의 성공과 시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성립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혁명 정신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루이 16세 에게는 영리한 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라피옛 는 자기가 귀족임에도 평민 편에 서서 혁명을 주도하고 루이 16세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상실하자 프랑스 방위군 총 사령관으로 사실상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라피옛은 온건파로서 공화제보다는 실권 없는 왕을 유지하는 입헌 군주제를 추진한다.   그러다 급진 혁명 세력 (자코뱅) 으로부터는 반역자로 몰려 프랑스 밖으로 도주한 라피옛는 오스트리아 왕에 의해 투옥된다.  프랑스 내에서는 반혁명분자로 찍혔지만 프랑스 밖에서는 서로 다 친척 지간인 유럽 왕족들의 원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 목이 잘린 마리 앙토와넽은 오스트리아 왕과 남매지간이라고 한다.  5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 라피옛은 급진 혁명 파가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집권한 프랑스로 돌아가서 산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라피옛은 나폴레옹이 자기 정부에 끌어 들이려고 여러 가지 자리를 제안하지만 거부했다.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쫓겨나고 왕정으로 복귀하자 라피옛은70대 고령의 나이에도 다시 시민 혁명에 참가하여 다시 시민군 총 사령관이 되는데 왕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을 맡아 줄 것을 요청 받았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라피옛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도 자기가 원했다면 나폴레옹처럼 프랑스의 정권을 잡을 수 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또 인상적인 부분은 라피옛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람둥이였고 미국 독립전쟁에다 프랑스 혁명등에 참가하느라 부인과 가정을 소홀히 했던 라피옛에게 부인은 아주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라피옛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부인은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쯤 되는 사람 집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일부러 찾아가 오스트리아 왕에게 라피엣과 함께 투옥되도록 간청했다고 한다.  프랑스 최고의 열녀였던 모양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은 딸도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동정심을 유발해 남편을 빨리 석방시키기 위한 술책 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왕은 그녀의 소원을 말 그대로 들어준다.  그 감옥이라는 것이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중세 건물의 지하방으로서 춥고 습기가 많아 라피옛 의 부인은 감옥 살이 동안 병을 얻어 죽을 뻔 했고 출소한 뒤에도 그 병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딸은 감옥으로 데리고 들어갔지만 아들은 미국으로 피신시켜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자기 집으로 데려와 손자처럼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몰랐던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이 원래 프랑스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원래 귀족을 풍자하고 혈연에 바탕을 둔 귀족 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연극이어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던 연극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도 금지된 적이 있지만 아주 인기가 많았던 연극이었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혁명적 사상을 많이 자극한 연극이었다고 한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버전에선 정치적 요소를 많이 줄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당시 프랑스의 진보 세력이 처음부터 차라리 라피옛 의 생각대로 입헌 군주제에 만족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도 피할 수 있었고 무정부 사태의 혼란이나 급진 세력의 길로틴 공포 정치도 피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의  독재 정권도 건너 띄어 오히려 더 빨리 프랑스 혁명이 끝나 시민 주권 국가가 떠 빨리 정착되지 않았을까?  물론 형식적이나마 거추장스러운 왕이 계속 존재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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