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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5.22 한국 전쟁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2. 2009.04.06 트루만과 6 25 -- 2/2


한국 전쟁

 

왕복 두 시간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오디오 북을 도서관에서 빌려 운전하면서 듣는다. 딱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마지못해 빌린 것이 David Halberstam 이라는 사람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이다. 예상 외로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중단하는 것을 아쉬워 하며 차에서 내리곤 했다. Halberstam 이라는 사람은 기자출신으로서 베트남 전에 대한 책으로 유명하고 풀리쳐 상을 받은 사람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전쟁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미군 사병들이나 장교들을 찾아 다니며 인터뷰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저자는 맥아더 장군과 그의 심복인 아몬드 (Edward Almond) 장군을 포함한 지도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국전쟁에서 실제로 싸웠던 미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대체로 맥아더를 싫어한다고 한다. 한국전에서 그렇게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것은 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33,000 명의 미군과 415,000 명의 한국인들과 백오십만의 북한사람들과 중국 군이 사망 했다고 한다. )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하고 지원해 달라고 조르던 도중에 당시 미 국무 장관이 애치슨 (Acheson) 이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별 생각 없이 아시아 방어선에 남한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침 직전 아주 자신에 차 있어서 중국의 모택동이 도와주겠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중국 특사들을 홀대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후 약 한 달 만에 한미 연합군을 부산 지역까지 후퇴시켰다. 그러자 맥아더는 그 유명한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패퇴시킨 것 까진 좋았는데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취해 중공군의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압록강까지 한미 연합군을 서둘러 밀어 부쳤다고 한다. 그래서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함정에 빠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미군 전투역사에 남을만한 대패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현장 지휘관들은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북진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경에서 총지휘를 하고 있는 맥아더는 기자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 소리치며 서두를 것을 명령했고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참모들은 맥아더의 지시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고 한다. 맥아더의 심복인 아몬드 장군도 그런 상황에 한몫을 했단다.

 맥아더 장군은 자기 휘하 병사들의 안전이나 목숨보다는 자신의 명성이나 역사적 업적을 더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한국민은 물론 당시 미국민의 영웅이던 맥아더는 명성이나 영향력이 너무 커서 미국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직책은 일본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지만 백악관에 대해서 마치 외국 국가 수반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에서 맥아더는 거의 신격화된 대접을 받았다 한다. 트루만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도 바빠서 워싱턴에 못 간다고 거부 하자 백악관이 타협해서 워싱턴과 동경의 중간지점에서 만났는데 맥아더는 국방장관은 물론 대통령에게도 경례를 부치지 않았다고 한다.

 맥아더가 참모들의 만류에도 무리하게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도 실리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군대를 보내자면 동해안이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1 차 대전과 2 차 대전을 거치면서 쌓아온 전쟁 귀재의 명성에 걸맞은 과감하고 예상치 못한 상륙작전으로 자기 군 경력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공을 주로 자기에게 돌리려고 한국 주둔군 총사령관인 워커 장군에게 지휘를 맞기지 않고 자기 심복인 아몬드 장군에게 진두 지휘를 맡겼다고 한다. 원래 같은 전투에서 지휘권을 분산시키지 않는 것이 병법의 정석이라는데 맥아더는 한국전의 지휘권을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과 심복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 두 사람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한국전의 전공을 주로 자기에게 돌리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또 인천 상륙 이후에는 낙동강으로부터 퇴각하는 북한군부터 차단하고 섬멸하는 것이 정석인데 북한군의 주력 부대를 퇴각하도록 나두고 대신 서울 탈환에 시간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것도 언론을 의식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서울 탈환의 상징성 때문이다.

저자는 맥아더의 심복인 아몬드 군단장에 대해서도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맥아더의 비서실장으로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 그 덕에 요직도 차지하고 진급도 한 사람인데 부하들에게는 아주 거만하고 전선의 상황이나 부하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맥아더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몬드는 또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여서 은퇴한 뒤에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격리시켜 군복무를 시켜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물론 당시 미군은 대체로 거의 모두 동양인들을 국 (Gook) 이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인종차별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 당한 이유에 북한군을 무시한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 (Walton Harris Walker 1889-1950) 에 대해서는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스키를 좋아해서 별명이 “자니 워커” 인 그는 처음부터 맥아더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제일 신임하지 않던 장군에 전력이 제일 약한 부대를 개전 이후 처음 한국으로 보낸 이유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이유도 있다고 한다. 전쟁 초반에는 연패를 해서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낙동강 전투에서 분투하면서 부산을 방어하는데 공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 이후 패퇴하는 과정에서 지프차가 전복해 사망했는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것이다.

 워커의 후임인 리지웨이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미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고 평가받는 리지웨이가 처음부터 미8군 사령관을 맡았더라면 한국전쟁이 더 적은 희생으로 더 유리한 위치에서 끝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리지웨이의 가장 큰 장점은 당시 미군 내에 신망과 비중이 커서 맥아더의 간섭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지휘를 할 수 있는 장군이라는 것이다. 만일 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에 대비하면서 신중하게 북진했더라면 공군도 없고 중화기가 약한 중공군에게 그렇게 쉽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해전술에 좀 밀렸더라도 한반도에서 동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가장 좁은 평양 선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한다.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맥아더는 일선 지휘관들의 반복되는 경고나 호소를 무시하고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무조건 압록강까지 진격을 명령해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연합군이 압록강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빨리 뉴스에 나오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불사하며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한 이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전쟁을 패배 또는 무승부로 끝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과 전면전을 하게 되면 소련의 개입이 확실시 되고 3차 대전이 발생하게 되는 상황에서 트루만은 정치적인 부담을 무릅쓰고 미국의 영웅 맥아더를 해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때 미국이 더 많은 미군을 파병하여 중국과 더 적극적으로 싸워서 한반도에서 아예 밀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 맥아더의 주장대로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을 벌여서 모택동을 몰아내고 장개석이 중국의 정권을 탈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이 그때부터 자본주의 체제로 산업화를 시작했다면 지금 미국보다 훨씬 큰 경제 대국이 되어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아예 밀어내지 못했더라도 평양선에서 막고 휴전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아무리 중공군의 수가 많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동경에 앉아 안일하게 지휘하던 맥아더 지휘부의 실책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한국전의 승자는 모택동이라고 쓰고 있다. 개전 당시 막 장개석을 몰아낸 이후 중국 내에서의 정치적 위치도 확고하지 않았고 스탈린에게도 무시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 휴전선까지 밀고 내려가 버틴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큰 승리였고 국제사회에서 신생 중국 공산국가의 위세를 떨친 효과를 가져온 것이라 한다. 그 이후 모택동은 중국에서 황제에 비교되는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 이를 한번도 닦지 않아서 이가 초록색이었던 (차를 많이 마셔서) 모택동은 황제처럼 중국 각지에서 진상하는 처녀들을 즐겼고 명분상 사회주의자이지만 사실 “인민” 의 목숨을 아주 사소하게 여겼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한국전에서 살아남은 미군들은 귀국 후 별 주의도 칭찬도 받지 못하고 왜 미국이 한국에서 싸워야 했나 또는 그 수많은 목숨을 잃을 만한 가치가 있었나 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근래에 남한이 러시아를 능가할 만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자 그에 대해 보람을 느끼는 참전 용사도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가장 추운 겨울” 인 이유는 당시 연합군에게 중공군보다 무서웠던 것이 피할 수 없는 추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전 후 30년 만에 참전 군인 둘 이 처음 만났는데 인사말이 “이제 몸이 다 녹았는가?” 이었다고 한다. 한국이 아주 추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을 가끔 만나는데 한국전쟁의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긴 뉴욕 (위도 40도) 이 서울 (위도 37도) 보다 북쪽에 있는데도 서울의 겨울이 뉴욕의 겨울에 비해 더 춥게 기억되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서울의 겨울 평균 기온은 영하 5도 이고 뉴욕시는 영상 1도가 좀 안된다고 한다.

이 책을 쓰고 난 후 며칠 안돼 저자는 다음 책을 준비하려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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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루만과 6 25   -- 2/2

 

일본의 항복으로 2차 대전이 끝나고 미국은 국방 예산을 대폭 감축하는 와중에 한국 전쟁이 일어난다.  당시 미국에서는 남한을 방어할 가치가 있는 가에 대하여 애매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난 그 전에 왜 미국이 다 끝나가는 일본과의 전쟁에서 소련의 참전을 허용해 소련이 북한에 진주할 구실을 주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러나 트루만은 남한의 공산화를 방관하면 유럽이나 다른 지역에서도 러시아와 중공이 세력을 확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해서 의회의 비준을 받기도 전에 참전을 결정한다.  그래서 미국에선 한국 전쟁을 트루만의 전쟁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물론 한국 전쟁엔 미군뿐 아니라 UN 군 즉 여러 나라 군대가 참전했다.  통계를 찾아보니까 미군 다음으로 전사자를 많이 낸 군대는 뜻밖에도 터키군이다.  터키의 군대가 많이 참전한 이유는 당시 터키도 소련의 침공 위협을 받고 있기 때문인 듯싶다.  그래도 물론 미군이 주도적 역할을 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군이 6백만명 가까이 되고 5만명이 넘는 전사자를 냈다고 한다.  한국군은 20만명 훨씬 넘게 사망했고 부상자와 실종자를 합치면 백만명에 육박한다.  

 

한국 전쟁과 그 직후의 처절한 상황을 직접 경험한 한국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정치적 과제는 제 2 의 한국 전쟁을 막는 것일지도 모른다.  한국 전쟁과 그 후유증을 직접 체험한 세대에게 그 당시의 극한적 상황이 뇌리 속에서 결코 지워지지 않을 것이다.  현재 한국 정치에서 보수와 진보의 대결의 한 축은 앞으로 북한 (또는 공산 세력) 의 침공에 의해 전쟁이 날 가능성이 얼마나 있느냐에 대한 의견 차이가 아닐까? 

 

한가지 궁금했던 것은 트루만과 맥아더와의 관계이다.  트루만은 대통령이고 맥아더는 대통령과 국방장관과 육군 참모총장을 상관으로 모셔야 할 장군인데 맥아더는 트루만을 무시했다고 한다.  트루만이 한국 전쟁을 지휘하는 맥아더 장군을 만나고 싶었는데 일본에서 왕 노릇을 하던 맥아더는 바쁘다고 워싱턴까지 날아가길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서로 타협해서 와싱턴과 도꾜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섬에서 만났다는 것이다.  그 뒤로도 맥아더는 계속 대통령의 지시를 어기고 항명을 하는데도 트루만은 맥아더를 해임하지 못했다.  중공군의 개입에 예상하지도 대비하지 않아 연합군이 압록강에서 대패하여 퇴각하고 중공과의 확전과 장개석 정권의 중국 탈환까지 거론하자 할 수 없이 트루만은 맥아더를 해임한다.

 

맥아더를 쉽게 해임하지 못했던 것은 여론과 공화당의 맥아더에 대한 지지 때문이었던 것 같다.  막상 맥아더를 해임시키자 미국에선 난리가 났다. 말하자면 일종의 촛불시위가 벌어졌던 모양이다.  귀국하는 맥아더를 환영하기 위해서 군중이 모여들고 성대한 퍼레이드가 열리기도 하고 미국인들은 맥아더를 신격화 했다는 것이다.  상원에선 왜 맥아더를 해임시켰는지에 대하여 청문회까지 열렸다고 한다.  당시의 기세론 맥아더가 마음만 먹으면 쉽게 차기 대통령이 될 수 있을 정도였는데 맥아더의 인기는 금세 식었던 모양이다.  그 이유 중 하나가 청문회의 결과이다.  트루만의 잘못을 조사하자고 만든 청문회인데 막상 내막을 알고 보니 맥아더의 잘못이 많았던 것을 사람들이 깨닫게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트루만은 맥아더와 반대되는 유형의 사람이다.  자기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의식도 별로 없고 특출한 재능도 없었지만 착실하게 열심히 최선을 다하는 사람.

 

트루만은 간신히 재선 (사실상 초선) 에 성공하는데 그가 재선에 성공할 것이라고 예측한 여론 조사 기관이 하나도 없었다고 한다.  심지어 어떤 신문사는 상대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는 오보를 일면 기사에 내기도 한다.  트루만은 한번 더 대통령에 출마할 수도 있었지만 (사실상 3번째 임기) 포기한다.   인기도 없고 8년 이상 대통령을 할 의욕도 없었던 듯 싶다.  트루만 이후 미 의회는 대통령에 임기를 2 선으로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다고 한다.   트루만은 재임 중에 별로 인기가 없었지만 나중에 미국 역사가들로부터 재임시 인기보다 낳은 평가를 받는다.   물론 그에게는 핵무기를 최초로 실전에 사용한 사람이라는 ‘원죄’ 는 언제나 따라다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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