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전쟁

 

왕복 두 시간 뉴저지에서 뉴욕으로 출퇴근하는 지루한 시간을 달래기 위해 오디오 북을 도서관에서 빌려 운전하면서 듣는다. 딱 눈에 띄는 것이 없어 마지못해 빌린 것이 David Halberstam 이라는 사람이 쓴 한국전쟁에 관한 책 THE COLDEST WINTER: America and the Korean War 이다. 예상 외로 재미있어서 목적지에 도착하면 중단하는 것을 아쉬워 하며 차에서 내리곤 했다. Halberstam 이라는 사람은 기자출신으로서 베트남 전에 대한 책으로 유명하고 풀리쳐 상을 받은 사람이다.

 이 책은 저자가 한국전쟁에서 직접 총을 들고 싸웠던 미군 사병들이나 장교들을 찾아 다니며 인터뷰하고 그들의 입장에서 쓴 것이다. 그런 입장에서 저자는 맥아더 장군과 그의 심복인 아몬드 (Edward Almond) 장군을 포함한 지도부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한국전쟁에서 실제로 싸웠던 미군 병사들과 장교들은 대체로 맥아더를 싫어한다고 한다. 한국전에서 그렇게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것은 그의 책임이 크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에서33,000 명의 미군과 415,000 명의 한국인들과 백오십만의 북한사람들과 중국 군이 사망 했다고 한다. )

 한국전쟁은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을 허락하고 지원해 달라고 조르던 도중에 당시 미 국무 장관이 애치슨 (Acheson) 이 기자회견을 하는 도중 별 생각 없이 아시아 방어선에 남한을 포함시키지 않은 것이 계기가 되어 시작되었다고 저자는 서술하고 있다. 김일성은 남침 직전 아주 자신에 차 있어서 중국의 모택동이 도와주겠다는 것도 필요 없다고 하면서 중국 특사들을 홀대했다고 한다.

 북한군은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그 후 약 한 달 만에 한미 연합군을 부산 지역까지 후퇴시켰다. 그러자 맥아더는 그 유명한 인천 상륙 작전을 감행하여 북한군을 패퇴시킨 것 까진 좋았는데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취해 중공군의 개입에 전혀 대비하지 않고 압록강까지 한미 연합군을 서둘러 밀어 부쳤다고 한다. 그래서 매복해 있던 중공군의 함정에 빠져 수많은 사상자를 내며 미군 전투역사에 남을만한 대패를 자초했다는 것이다. 사실 많은 현장 지휘관들은 중공군이 개입한 것을 눈치채고 조심스럽게 북진하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동경에서 총지휘를 하고 있는 맥아더는 기자들에게 크리스마스까지 전쟁을 끝내겠다고 큰 소리치며 서두를 것을 명령했고 인천 상륙작전 성공 이후 참모들은 맥아더의 지시에 이의를 달지 못했다고 한다. 맥아더의 심복인 아몬드 장군도 그런 상황에 한몫을 했단다.

 맥아더 장군은 자기 휘하 병사들의 안전이나 목숨보다는 자신의 명성이나 역사적 업적을 더 중요시하게 생각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한국민은 물론 당시 미국민의 영웅이던 맥아더는 명성이나 영향력이 너무 커서 미국 대통령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고 직책은 일본 주둔 연합군 총사령관이었지만 백악관에 대해서 마치 외국 국가 수반처럼 행동했다고 한다. 사실 일본에서 맥아더는 거의 신격화된 대접을 받았다 한다. 트루만 대통령이 만나자고 해도 바빠서 워싱턴에 못 간다고 거부 하자 백악관이 타협해서 워싱턴과 동경의 중간지점에서 만났는데 맥아더는 국방장관은 물론 대통령에게도 경례를 부치지 않았다고 한다.

 맥아더가 참모들의 만류에도 무리하게 인천 상륙작전을 감행한 것도 실리보다는 자신의 명성을 위해 그런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일본에서 군대를 보내자면 동해안이 훨씬 가까웠던 것이다. 1 차 대전과 2 차 대전을 거치면서 쌓아온 전쟁 귀재의 명성에 걸맞은 과감하고 예상치 못한 상륙작전으로 자기 군 경력의 마지막을 화려하게 장식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것이다. 인천 상륙작전의 공을 주로 자기에게 돌리려고 한국 주둔군 총사령관인 워커 장군에게 지휘를 맞기지 않고 자기 심복인 아몬드 장군에게 진두 지휘를 맡겼다고 한다. 원래 같은 전투에서 지휘권을 분산시키지 않는 것이 병법의 정석이라는데 맥아더는 한국전의 지휘권을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과 심복인 10군단장 아몬드 장군 두 사람으로 나누었다고 한다. 한국전의 전공을 주로 자기에게 돌리려는 의도였다는 것이다. 또 인천 상륙 이후에는 낙동강으로부터 퇴각하는 북한군부터 차단하고 섬멸하는 것이 정석인데 북한군의 주력 부대를 퇴각하도록 나두고 대신 서울 탈환에 시간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것도 언론을 의식한 작전이라는 것이다. 서울 탈환의 상징성 때문이다.

저자는 맥아더의 심복인 아몬드 군단장에 대해서도 아주 부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별로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맥아더의 비서실장으로서 절대적인 충성심을 보여 그 덕에 요직도 차지하고 진급도 한 사람인데 부하들에게는 아주 거만하고 전선의 상황이나 부하들의 안전을 고려하지 않은 채 무조건 맥아더에게 잘 보이기 위해 애쓴 사람으로 묘사하고 있다. 아몬드는 또 심한 인종차별주의자여서 은퇴한 뒤에도 흑인들은 백인들과 격리시켜 군복무를 시켜야 한다는 캠페인을 벌였다고 한다. 물론 당시 미군은 대체로 거의 모두 동양인들을 국 (Gook) 이라고 부르며 무시하는 인종차별적 태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전쟁 초기에 당한 이유에 북한군을 무시한 이유도 있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 8군 사령관 워커 장군 (Walton Harris Walker 1889-1950) 에 대해서는 동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위스키를 좋아해서 별명이 “자니 워커” 인 그는 처음부터 맥아더의 신임을 얻지 못했다고 한다. 자기가 제일 신임하지 않던 장군에 전력이 제일 약한 부대를 개전 이후 처음 한국으로 보낸 이유는 북한군을 과소평가한 이유도 있다고 한다. 전쟁 초반에는 연패를 해서 낙동강까지 밀려났지만 낙동강 전투에서 분투하면서 부산을 방어하는데 공을 많이 세웠다고 한다. 그는 중공군의 개입 이후 패퇴하는 과정에서 지프차가 전복해 사망했는데 패전의 책임을 뒤집어 썼다는 것이다.

 워커의 후임인 리지웨이에 대해서는 아주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당시 미군에서 가장 유능한 장군이라고 평가받는 리지웨이가 처음부터 미8군 사령관을 맡았더라면 한국전쟁이 더 적은 희생으로 더 유리한 위치에서 끝낼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리지웨이의 가장 큰 장점은 당시 미군 내에 신망과 비중이 커서 맥아더의 간섭을 무시하고 독자적인 지휘를 할 수 있는 장군이라는 것이다. 만일 연합군이 중공군의 개입에 대비하면서 신중하게 북진했더라면 공군도 없고 중화기가 약한 중공군에게 그렇게 쉽게 패배하지 않았을 것이고 인해전술에 좀 밀렸더라도 한반도에서 동서 해안까지의 거리가 가장 좁은 평양 선에서 충분히 막을 수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를 비롯한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이라고 한다. 중공군이 개입했다는 것을 발견한 뒤에도 맥아더는 일선 지휘관들의 반복되는 경고나 호소를 무시하고 대비책을 세우지 않고 무조건 압록강까지 진격을 명령해 중공군의 매복에 걸려들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연합군이 압록강에 도달했다는 소식이 빨리 뉴스에 나오는 것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맥아더가 핵무기 사용을 불사하며 중국과의 전면전을 주장한 이유는 자기 생애의 마지막 전쟁을 패배 또는 무승부로 끝내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러나 중국과 전면전을 하게 되면 소련의 개입이 확실시 되고 3차 대전이 발생하게 되는 상황에서 트루만은 정치적인 부담을 무릅쓰고 미국의 영웅 맥아더를 해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한국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때 미국이 더 많은 미군을 파병하여 중국과 더 적극적으로 싸워서 한반도에서 아예 밀어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 때 맥아더의 주장대로 미국과 중국이 전면전을 벌여서 모택동을 몰아내고 장개석이 중국의 정권을 탈환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중국이 그때부터 자본주의 체제로 산업화를 시작했다면 지금 미국보다 훨씬 큰 경제 대국이 되어있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중공군을 한반도에서 아예 밀어내지 못했더라도 평양선에서 막고 휴전을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도 하게 된다. 아무리 중공군의 수가 많아도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동경에 앉아 안일하게 지휘하던 맥아더 지휘부의 실책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저자는 한국전의 승자는 모택동이라고 쓰고 있다. 개전 당시 막 장개석을 몰아낸 이후 중국 내에서의 정치적 위치도 확고하지 않았고 스탈린에게도 무시 당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세계 최강의 미국을 상대로 싸워서 휴전선까지 밀고 내려가 버틴 것은 중국의 입장에서는 큰 승리였고 국제사회에서 신생 중국 공산국가의 위세를 떨친 효과를 가져온 것이라 한다. 그 이후 모택동은 중국에서 황제에 비교되는 권력을 행사하게 되었다고 한다. 평생 이를 한번도 닦지 않아서 이가 초록색이었던 (차를 많이 마셔서) 모택동은 황제처럼 중국 각지에서 진상하는 처녀들을 즐겼고 명분상 사회주의자이지만 사실 “인민” 의 목숨을 아주 사소하게 여겼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한국전에서 살아남은 미군들은 귀국 후 별 주의도 칭찬도 받지 못하고 왜 미국이 한국에서 싸워야 했나 또는 그 수많은 목숨을 잃을 만한 가치가 있었나 라는 회의를 가지고 있던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 근래에 남한이 러시아를 능가할 만한 경제력을 가진 나라가 되자 그에 대해 보람을 느끼는 참전 용사도 있다고 쓰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이 “가장 추운 겨울” 인 이유는 당시 연합군에게 중공군보다 무서웠던 것이 피할 수 없는 추위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종전 후 30년 만에 참전 군인 둘 이 처음 만났는데 인사말이 “이제 몸이 다 녹았는가?” 이었다고 한다. 한국이 아주 추운 나라라고 생각하는 미국인들을 가끔 만나는데 한국전쟁의 기억 때문이 아닌가 싶다. 하긴 뉴욕 (위도 40도) 이 서울 (위도 37도) 보다 북쪽에 있는데도 서울의 겨울이 뉴욕의 겨울에 비해 더 춥게 기억되는 것은 사실이다. 인터넷을 뒤져 봤더니 서울의 겨울 평균 기온은 영하 5도 이고 뉴욕시는 영상 1도가 좀 안된다고 한다.

이 책을 쓰고 난 후 며칠 안돼 저자는 다음 책을 준비하려고 사람들을 인터뷰하러 다니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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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coln (1809-1865)
 
오바마가 읽고 영향을 받아 힐러리를 국무 장관에 임명했다고 유명해진 책이 Team of Rivlas (Team of Rivals: The Political Genius of Abraham Lincoln by Doris Kearns Goodwin) 이다.  링컨과 그의 내각이 어떻게 남북전쟁을 수행했는가를 서술한 책이다.   그때까지 선거에 나가서 이긴 적 보다 (한 다섯 번 정도) 진 적이 (여덟 번 정도) 훨씬 많은 링컨이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출마했을 때 경력이나 지명도에서 네 명의 후보 중 가장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후보였다고 한다.  그런데 가장 유력한 후보가 과반수를 얻지 못하자 여러 번의 재 투표를 하는 와중에 잘 알려져 있지 않아 반대파가 가장 없는 링컨이 합종연횡 또는 어부지리로 후보에 당선되었다고 한다.
 
링컨은 공화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자기와 경쟁했던 세 명을 모두 장관에 임명했다.  추측해 보건대 시골 변호사 출신에 최고 경력이 하원의원이었던 링컨은 대통령에 당선된 후 측근 중에서 장관을 시킬 만한 인물이 별로 많지 않았을 것이다.  또 링컨이라는 사람이 자기가 남보다 잘났다는 의식이나 자기를 무시하는 사람들에 대한 거부감이 별로 없고 능력위주의 인사를 하려고 했다고 한다.   국무부 장관에 임명한 수어드 (William H. Seward, 1801-1872) 라는 인물은 원래 가장 정치적 위상이 높고 제일 유력한 공화당 후보로서 처음에는 링컨을 무시했지만 나중엔 링컨의 지도력을 인정하고 내각에서 링컨에게 가장 큰 도움을 준 사람이다.  그러나 재무 장관에 임명한 체이스라는 인물은 끝내 링컨을 무시하고 자기가 차기 대선 후보가 되도록 뒤에서 공작을 벌였다고 한다. 
 
이 책에서 재미있게 느낀 것은 링컨의 용인술이나 링컨 내각의 이야기보다 링컨이라는 사람의 성격과 인생이다.   링컨의 일생은 좀 안타깝다 라든지 안됐다 같은 동정심을 많이 느끼게 한다.  먼저 링컨은 미국 개척지의 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생을 많이 하면서 자랐고 어머니가 9세 때 병사했다.   어릴 때부터 총을 들고 사냥을 해서 먹을 것을 구해와야 했고 나무를 해 와야 해서7살 때부터 도끼를 아주 능숙하게 잘 썼다고 한다.   링컨 하면 연상되는 그가 살던 통나무 집이란 사실상 야영 텐트와 큰 차이가 없는 주거 환경이었다.  농한기 때 한두 달씩 이곳 저곳 학교에 다닌 것 외에는 정규 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지만 링컨은 책을 읽는 것을 아주 좋아했다고 한다. 문맹이었던 아버지는 큰 아들 링컨이 “쓸데없이” 책을 읽는 것을 싫어해서 헛간이나 숲속에 들어가 책을 읽곤 했다고 한다.   새 엄마가 들어왔을 때 그녀의 짐속에 로빈슨크르소와  아라비안 나이트등의 책이 들어있는 것이 링컨에게는 커다란 위안이었다고 한다.  
 
링컨의 첫사랑이었던 여자는 갑자기 병사해서 상심한 링컨은 따라서 죽으려고 했다고 한다.   링컨은 그 뒤로도 여러 번 심한 우울증 증상에 시달렸다.   자수성가한 링컨은 어떤 부잣집 딸과 “망설이다” 결혼하는데 자기가 최소한 상원의원의 부인쯤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링컨의 부인은 아마 바가지를 많이 긁었던 모양이다.  부인이 성질을 내면 아이들은 숨고 링컨은 피했다고 하는데 시골 변호사로서 이 동네 저 동네 출장을 다니던 링컨은 그래서 출장 여행을 반겼다고 한다.   링컨의 부인이 화를 내는 것을 남북전쟁 당시 북군 총 사령관 그랜트 장군과 그의 부인이 목격한 것이 이 책에 소개되어 있다.  대통령이 된 링컨이 부인과 함께 그랜트 장군이 지휘하는 북부 연방군 총 사령부를 방문하는데 링컨과 그 수행원은 말을 타고 가고 부인 마차를 타고 가면서 진흙탕이 된 길 때문에 마차의 속도가 많이 늦어졌다고 한다.  먼저 도착한 링컨이 보니까 전체 사병들이 도열해서 기다리고 있고 부인을 기다리다 보면 병사들의 식사시간이 늦춰질 것 같아 그냥 사열을 시작하겠다고 지시했다고 한다.   원래 대통령 부부가 함께 마차를 타고 도열한 병사들을 지나가며 손을 흔드는 행사였던 것 같은데 링컨의 부인은 그런 것을 좋아했던 모양이다.  도착해서 링컨이 먼저 사열을 하고 있는 것을 본 부인은 화를 내고 욕을 하고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랜트 장군의 부인은 어쩔 줄 몰라 하고 수행한 또 다른 부인은 자기가 무슨 잘못을 했길래 야단을 치느냐고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링컨의 부인의 신경질은 그날 저녁 만찬 때까지 식지 않아서 사람들 앞에서 링컨에게 야단을 치고 있었고 링컨이 그냥 미소를 지으며 부인의 불평을 가만히 듣고 있었으며 그랜트 장군은 그러는 링컨을 옆에서 놀란 표정으로 지켜보다가 그날 일기에 썼다고 한다.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일생일대의 영광이요 승리였지만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자 마자 남북 전쟁을 일어나 그걸 즐길 겨를이 없었다.   백악관  창문에서 보이는 버지니아 주가 남부군에 합류하는 바람에 수도 워싱턴이 남부군에 점령될까봐 잠을 못 이룬 적도 많았고 또 그 와중에 큰 아들이 병에 걸려 죽는 것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다.   링컨의 각료나 장군들 중엔 임기 초기에 시골 촌뜨기 변호사 출신 링컨을 은근히 무시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남북전쟁이 승리로 끝나고 사람들이 링컨이라는 사람을 진정으로 인정하고 존경하기 시작하고 대통령에 재선 되었을 때 부인을 포함한 주의 사람들은 평소에 무표정한 링컨이 그렇게 행복한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적이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암살을 당하는 것이다.  힐러리에 비유되는 국무 장관 수어드는 다른 장소에서 공격을 받아 중상을 입고 있어서 사람들이 링컨의 죽음을 알리지 않았다고 한다.  처음엔 경쟁관계 였지만 남북전쟁을 치르면서 링컨과 상호간에 신뢰와 존경심을 키워오던 관계였는데 링컨이 병실에 찾아오지 않는 것을 수어드는 이상하게 여겼다.  그러다 창밖에 조기가 걸린 것을 보고 링컨이 암살당한 것을 눈치챈 수어드는 소리를 내어 울었다고 한다.
 
링컨 하면 제일 먼저 떠 오르는 것은 물론 노예 해방이다 (링컨의 업적 중에는 미국의 추수 감사절 Thanksgiving 을 만든 것도 있다).   링컨이 미국에서 가장 위대한 대통령으로 존경 받고 세계인들의 존경을 받는 것이 노예 해방과 관계가 있다.  링컨이 승전 직후 당시 남부의 수도 리치몬드를 방문했을 때 길거리에서 그를 알아본 흑인들이 몰려와 구세주가 오셨다며 둘러싸고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고 한다.  암살자가 있을까봐 경계하던 링컨의 일행은 놀라기도 하고 감격하기도 했는데 링컨이 자기에게 무릎을 꿇은 흑인 노인에게 그러지 말고 일어나라고 하자 흑인들은 링컨을 둘러싸고 찬송가를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나 링컨이 노예제도를 폐지하기 위하여 남북 전쟁을 일으킨 것은 물론 아니다.   링컨은 노예 제도를 반대했지만 그것을 없애기 위해서 당시 미국 인구의 2% (60만명 정도) 가 사망하게 되는 전쟁을 일으키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지금 남북한 인구에 비유하면 거의 150만명의 사람들이 사망한 것이다.)   노예 제도를 (최소한 그 제도의 확산을) 반대하는 북부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화당의 후보 링컨이 대통령에 당선 되자 남부가 미리 분리를 선언했다.  (어떻게 보면 당시 공화당의 성격은 요새 미국 공화당의 성격과 반대이다.) 그러면서 남부 지역에 위치한 중앙정부의 지휘하에 있던 군기지를 남부군이 먼저 공격해서 점령하자 남부를 달래는 유화책을 모색하던 링컨은 무력을 사용해 남부의 반란에 대응하도록 결정한 것이다.  미국인들의 입장에서 링컨의 가장 큰 공적은 미국의 분리를 막은 것이다.
 
링컨을 살해한 부쓰 (John Wilkes Booth) 와 그 일당은 링컨을 악인이며 독재자라고 확신했고 자기들이 정의의 편에 서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쫓기던 부쓰가 다리가 부러져서 아프고 춥고 배고픈 와중에 먼저 찾은 것은 신문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문을 본 부쓰는 실망했다. 사람들이 자기를 영웅으로 생각할 줄 알았는데 그 반대였기 때문이다.  링컨은 원래 남부의 전후 처리에 대하여 아주 관용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링컨의 암살로 남부 사람들은 더 미움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객관적으로 쓰인 위인들의 전기를 읽으면 이 사람도 이런 부정적인 측면이 있었구나 또는 역시 이 사람도 과대 평가 되었구나 같은 생각이 드는 경우가 많은데 링컨의 경우엔 기분이 다르다.  미국 뿐 아니라 전 세계 사람들로부터 위인 대접을 받는 것에 대하여 별로 이의를 제기하고 싶은 생각이 안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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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불짜리 사나이 - 알렉산더 해밀튼 

 

알렉산더 해밀튼  Alexander Hamilton (1755 – 1804)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미국에 사는데 미국 역사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워싱턴의 전기를 읽고 난 뒤 미국의 건국사에 관심이 생겨서 워싱턴 다음으로 유명한 미국 3 대 대통령 제퍼슨의 전기를 오디오 북으로 된 것으로 찾았는데 못 찾고 대신 찾은 것이 해밀튼의 전기였다.  마지못해 시작한 책인데 종종 그렇듯이 읽다 보니 재미가 붙은 책이다.  이 사람의 일생도 웬만한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해밀튼은 미국의 여러 건국 공신들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히는 사람이다.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 한 사람만을 국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헌의회나 독립선언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을 모두 국부들 (Founding Fathers) 이라고 부르는데 해밀튼은 그 중에서도 거의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드는 사람이다.   워싱턴 (1 대 대통령) , 벤자민 프랭클린, 제퍼슨 (3 대), 아담스 (2 대), 메디슨 (4 대 대통령) 과 동렬에 드는 것이다.  이들 중 벤 프랭클린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대통령이 될 수 없었고 해밀튼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꽃뱀 스캔들” 때문인 것 같다.

 

해밀튼은 출생부터 아주 드라마틱하다.  중남미에 위치한 영국령 서인도 제도 섬에 살던 해밀튼의 모친은 아주 미녀였는데 해밀튼 할머니의 강권으로 아주 젊은 나이에 아주 나이 많은 유대인과 결혼했다.  물론 돈 때문이었다.  남편의 구박이 먼저였든지 아내의 바람이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젊은 아내를 간통 혐의로 감옥에 가둔다.  해밀튼이 모친은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남편을 피해 다른 섬으로 도망가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 해밀튼을 낳았다.  그러나 전 남편이 끝내 법적으로 이혼을 해주지 않아 해밀튼은 결국 법적으로 사생아로 남게 되고 평생 그 꼬리표 (Bastard) 가 따라 다닌다.  게다가 해밀튼은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과 너무 닮아서 사람들이 혹시 바람기가 있던 해밀튼의 모친이 자기 남편 친구와 바람을 피워 낳은 애가 해밀튼이 아닌가에 대하여 논란도 있다고 한다.

 

부모가 일찍 죽어 고아가 된 해밀튼은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다 신문에 글을 투고했는데 그 글 솜씨에 감탄한 독지가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뉴욕의 킹스 칼리지 (지금의 컬럼비아 대학) 로 유학을 가게된다.  대학생 때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며 참전한 해밀튼은 워싱턴의 눈에 들어 그의 당번병 겸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한다.   지난 글에 썼던 라피옛이 당시 워싱턴 수하에 있었는데 비슷한 또래인 해밀튼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해밀튼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고 뉴욕을 대표하여 제헌 의회에 참여한다.  존 아담스 (2대 대통령) 와 토마스 제퍼슨 (3대) 이 독립전쟁 당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의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것처럼 해밀튼은 제임스 매디슨 (4 대 대통령) 과 함께 독립 성취 후 헌법을 만든 제헌 의회의 중심 인물이 된다.  초대 대통령에 만장 일치로 추대된 와싱턴은 자기의 비서실장 출신의 해밀튼을 초대 재무장관에 임명한다.  당시 전쟁으로 빛더미에 올라있던 미국의 행정부에서 재무부는 가장 중요하고 힘 있는 자리로서 사실상 총리 급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재무부 장관 해밀튼은 국립 은행을 설립하는 등 미국 경제체제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다.  지금 미국의 총리 급 장관은 국무장관이다.  당시 국무 장관은 제퍼슨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미 국무부는 비서를 포함해 전체 인원이 다섯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2인자가 된 해밀튼은 바람이 난다.  (많은 남자들은 권력을 잡으면 바람을 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필 꽃뱀 부부팀에 걸려 내연녀의 남편에게 협박도 받고 돈도 뺏기고 했다고 한다.  (18세기 미국에도 꽃뱀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당장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계를 끊으려 하면 남편 (기둥서방?) 이 편지를 보내 관계를 계속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남편은 나중에 해밀튼이 정말 관계를 끊고 돈 보내는 것을 중단하자 꽃뱀 아내와 이혼했다. 이 기둥 서방이 나중에 다른 사기 혐의로 감옥에 갇히자 해밀튼의 비리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 감옥에서 나오려 하면서 해밀튼의 스캔달은 먼로 (5 대 대통령) 등 정적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사실 해밀튼의 정적들은 워싱튼의 총애를 받으며 2 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헤밀튼이 재무 장관 직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했을 것으로 의심했다 한다.  해밀튼은 먼로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자기의 치부를 공개하고 눈 감아줄 것을 부탁한다. 자기들이 생각하던 비리가 아닌 것을 깨달은 정적들은 신사적으로 그 일을 묻어둘 것을 약속하는데 나중에 결국 그 비밀은 세상에 알려진다. 

 

그 일로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그래도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남아있어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3 대 대선 때 제퍼슨과 애론 버 (Aaron Burr, Jr. 1756 – 1836) 가 선거인단 표에서 동수를 기록해서 미 하원에서 재투표를 여러 번 한 뒤 가까스로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고 버는 부통령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데 해밀튼이 영향력을 행사한 모양이다.  그때부터 해밀튼에게 나쁜 감정을 갖게 된  애론 버는 후에 해밀튼이 자신에게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쁘게 얘기했다고 결투를 신청한다.  해밀튼은 결투에 대하여 묘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피하지는 않지만 결투에 임해서는 상대방을 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론 버는 결투를 위해 사격 연습까지 하지만 해밀튼은 자기는 상대방을 쏘지 않을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만일을 대비해 유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결국 이 결투에서 해밀튼은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한다.  기가 막힌 것은 해밀튼이 죽기 3년전 해밀튼의 아들도 똑같은 이유와 상황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고 잘 생긴 해밀튼의 아들도 결투 신청을 받는데 결투는 하되 상대방은 쏘지 않는다는 철학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해밀튼의 아내는 큰 아들과 남편을 모두 결투 때문에 잃은 것이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애론 버는 결투에선 이겼지만 해밀튼의 살인범으로 몰려 정치 생명도 끝나고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사망한 해밀튼은 사람들의 동정심 등으로 영웅으로 추대되고 그의 이름을 딴 해밀튼 칼리지도 생기고 컬럼비아 대학엔 그의 동상과 기념관 등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지폐 중 하나인 10 불 짜리 지폐 위에 초상화를 남긴다.   (그 보다 더 많이 쓰이는 1불 짜리 위엔 워싱턴이 5불 짜리 위엔 링컨이 있다.)

참고:

Alexander Hamilton
by Ron Cher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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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r Liberty and Glory: Washington, Lafayette, and Their Revolutions by James R. Gaines

 

이 책은 미국 독립 전쟁과 불란서 혁명 그리고 그 두 혁명의 주역인 조지 워싱턴과 라피옛 (Marquis de Lafayette 1757-1834) 의 일생에 대한 책이다 (그의 원래 이름은 Marie Joseph Paul Yves Roch Gilbert Du Montier Lafayette 이라고 한다.  김수한무.. 삼천갑자 동방석...).   아마 저자의 의도는 라피옛 에 대하여 쓰는 것이었는데 책이 더 잘 팔리게 하기 위해 워싱턴의 얘기와 묶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라피옛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이 책을 통해 처음 자세하게 알게 되었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선 고등학교 때 역사 시간에 들은 로비에스 피엘이나 당통 같은 이국적 이름이나 공포 정치, 길로틴과 함께 기억하는 것이 전부였고 라피엣이라는 인물에 대해서는 내가 무식해서 잘 몰랐던 것이다.   뉴욕시에 라피옛 의 동상도 여럿 있고 라피옛 광장도 있다.   맨하탄 유니온 광장의 동상은 지나가면서 많이 봤으면서도 그의 동상인지 모르고 지나갔다.  미국엔 그의 이름을 딴 도시 (라피옛 파이엣츠 빌 등등) 도 400 개 정도 있고 라피옛 대학등 그의 이름을 딴 학교도 많이 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의 그에 대한 인기는 미국에서의 인기에 미치지 못했지만 최근 프랑스 여론 조사에서 프랑스 혁명을 대표하는 인물로 뽑혔다고 한다.

 

라피엣은 프랑스의 귀족 출신의 젊은 장교였는데 미국에서 독립 전쟁이 일어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자원병으로 참전한다.  당시에 유럽에서 특히 프랑스에서 미국 독립전쟁에 자원해서 참전한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동기는 왕정 시대인 당시 최초의 자유 민주주의 시민 주권국가를 세우는 것을 돕는다는 낭만적인 이유도 있고 미국을 도와 프랑스의 적국인 영국을 패배시키고 싶은 동기도 있었고 또 이름을 날리고 싶은 명예욕도 한몫 했다고 한다. 

당시 유럽에서 참전한 사람들은 자신의 유럽에서의 경력을 과장 또는 날조해서 미군에서 높은 계급을 얻으려 하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갓 스무살 정도의 프랑스 군 대위 출신 라피옛은 일약 미군의 장군 (소장) 으로 임명되었다.  그렇게 높은 대우를 받은 이유는 그가 워낙 프랑스에 잘 알려진 가문의 사람이어서 그를 중용함으로서 프랑스를 독립 전쟁에 끌어들이려는 계산도 한몫 했다고 한다.  하긴 따지고 보면 당시 미 독립군이라는 것이 군복도 제대로 없는 의병 수준이어서 프랑스 정규군 장교 출신이면 대우를 해줄만도 했다.

 

라피옛 는 미국 독립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워싱턴과 거의 부자지간 같은 우애를 쌓은 뒤 프랑스로 귀국한다.  미국에서 영웅이 된 라피엤은 프랑스에 돌아가서도 영웅 대접을 받는다.  당시 프랑스 사람들은 미국 독립 전쟁과 그 역사적 의미 즉 평등 사상이나 민주주의 등에 대하여 열렬한 지지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라피옛 는 일반 국민들 뿐 아니라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트와넷으로부터도 큰 환대를 받았다고 한다.  루이 16세는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에 돈도 빌려주고 군대도 파견했는데 그 비용 때문에 결국 자기 왕좌와 목숨을 잃게 된다.   미국 독립전쟁 이전부터 프랑스는 재정적으로 상황이 아주 좋지 않았는데 미국 독립 전쟁을 지원하느라 재정이 더 나빠져서 그걸 메우려 세금을 올리려 했다.  게다가 엎친데 덥친격으로 흉작으로 인한 식량난까지 일어나 국민들이 봉기한 것이다.  물론 그보다 더 근본적인 이유는 미국 혁명의 성공과 시민 민주주의 공화국의 성립이 프랑스를 비롯한 유럽에 혁명 정신을 불어넣었다는 것이다.  루이 16세 에게는 영리한 참모가 없었던 모양이다.

 

이 과정에서 라피옛 는 자기가 귀족임에도 평민 편에 서서 혁명을 주도하고 루이 16세가 실질적으로 권력을 상실하자 프랑스 방위군 총 사령관으로 사실상 최고 권력자가 된다.  그러나 라피옛은 온건파로서 공화제보다는 실권 없는 왕을 유지하는 입헌 군주제를 추진한다.   그러다 급진 혁명 세력 (자코뱅) 으로부터는 반역자로 몰려 프랑스 밖으로 도주한 라피옛는 오스트리아 왕에 의해 투옥된다.  프랑스 내에서는 반혁명분자로 찍혔지만 프랑스 밖에서는 서로 다 친척 지간인 유럽 왕족들의 원수로 인식되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혁명 와중에 목이 잘린 마리 앙토와넽은 오스트리아 왕과 남매지간이라고 한다.  5년간 옥살이를 하고 나서 라피옛은 급진 혁명 파가 몰락하고 나폴레옹이 집권한 프랑스로 돌아가서 산다.   민주주의를 신봉하던 라피옛은 나폴레옹이 자기 정부에 끌어 들이려고 여러 가지 자리를 제안하지만 거부했다.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쫓겨나고 왕정으로 복귀하자 라피옛은70대 고령의 나이에도 다시 시민 혁명에 참가하여 다시 시민군 총 사령관이 되는데 왕을 축출하는데 성공하자 새로운 프랑스 공화국의 대통령을 맡아 줄 것을 요청 받았지만 거부했다고 한다.  라피옛은 프랑스 혁명 초기에도 자기가 원했다면 나폴레옹처럼 프랑스의 정권을 잡을 수 도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에서 또 인상적인 부분은 라피옛의 부인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람둥이였고 미국 독립전쟁에다 프랑스 혁명등에 참가하느라 부인과 가정을 소홀히 했던 라피옛에게 부인은 아주 헌신적이었다고 한다.   라피옛이 감옥에 갇혔을 때 그의 부인은 프랑스 주재 미국 대사쯤 되는 사람 집에서 보호를 받고 있었는데 일부러 찾아가 오스트리아 왕에게 라피엣과 함께 투옥되도록 간청했다고 한다.  프랑스 최고의 열녀였던 모양이다.  이해가 잘 가지 않는 것은 딸도 함께 감옥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동정심을 유발해 남편을 빨리 석방시키기 위한 술책 이었는지도 모르지만 왕은 그녀의 소원을 말 그대로 들어준다.  그 감옥이라는 것이 창문도 화장실도 없는 중세 건물의 지하방으로서 춥고 습기가 많아 라피옛 의 부인은 감옥 살이 동안 병을 얻어 죽을 뻔 했고 출소한 뒤에도 그 병에서 완전히 회복하지 못했다고 한다.   딸은 감옥으로 데리고 들어갔지만 아들은 미국으로 피신시켜 대통령이 된 워싱턴이 자기 집으로 데려와 손자처럼 돌보아주었다고 한다.

 

또 한가지 몰랐던 것은  모차르트의 오페라로 유명한 피가로의 결혼이 원래 프랑스 혁명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연극이었다는 것이다.    피가로의 결혼은 원래 귀족을 풍자하고 혈연에 바탕을 둔 귀족 제도를 비판하는 내용을 담은 연극이어서 유럽의 여러 국가에서 공연이 금지되어 있었던 연극이었다고 한다.  프랑스에서도 금지된 적이 있지만 아주 인기가 많았던 연극이었고 많은 프랑스 사람들의 혁명적 사상을 많이 자극한 연극이었다고 한다.  모짜르트의 오페라 버전에선 정치적 요소를 많이 줄였다고 한다.

 

프랑스 혁명에 대해서 읽으면서 느낀 것은 당시 프랑스의 진보 세력이 처음부터 차라리 라피옛 의 생각대로 입헌 군주제에 만족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것이다.  그랬다면 다른 유럽 국가들과의 전쟁도 피할 수 있었고 무정부 사태의 혼란이나 급진 세력의 길로틴 공포 정치도 피할 수 있었고 나폴레옹의  독재 정권도 건너 띄어 오히려 더 빨리 프랑스 혁명이 끝나 시민 주권 국가가 떠 빨리 정착되지 않았을까?  물론 형식적이나마 거추장스러운 왕이 계속 존재했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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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들 (3). 토마스 제퍼슨

 

미국 최고의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선 시시 때때로 실시되는 여론조사도 있고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도 있는데 대체로 링컨, 워싱턴, 루즈벨트 (프랭클린) 의 뒤를 이어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 – 1826) 이 거론된다.  제퍼슨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가 거론되는데 미국 독립 선언서의 저자라고 인식과 미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는 것이다. 

 

3 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인 것에 대해서는 물론 이견이 없지만2 대 대통령 아담스의 의견대로 그가 독립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의 역할이 실제보다 과대 평가된 것은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아담스를 포함한 식민지 의회 지도자들은 먼저 벤자민 프랭글린에게 초고를 부탁했는데 프랭클린은 자기 원고가 의원회의 수정을 거치는 것이 싫다고 거부했고 아담스 자신은 “더 중요한 일” 때문에 바빠서 젊은 제퍼슨에게 맡기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이 제퍼슨을 독립선언문의 저자라고 떠 받드는 것을 보고 후회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라는 것의 주 내용은 영국왕이 미 식민지에 대하여 실시한 여러가지 불공정한 정책을 나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퍼슨은 독립선언문 초반부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권리와 행복 추구권을 가지고 있다” 라고 쓴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구절은 당시에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냥 멋을 내려고 쓴 것인지도 모르고 선언 직후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전세계적으로 왕정 대신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주류가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퍼슨이 이런 평등 논리를 신봉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입으론 만민 평등을 얘기하고 장기적으로 노예 제도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얘기하였지만 스스로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국가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퍼슨의 사람됨을 “이중적”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제퍼슨은 노예들을 집 안팍 일만 시킨 것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도 일을 시켜서 여러명의 아이를 낳았다.  제퍼슨의 침실 노예겸 소실은 샐리 해밍스라는 여자인데 사별한 아내의 이복 동생이자 몸종이었다고 한다.  샐리 해밍스의 아버지가 제퍼슨의 장인이었고 어머니가 장인 소유의 노예였다는 것이다.  샐리 헤밍스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 이었다고 한다.   제퍼슨이 해방시킨 유일한 노예는 헤밍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제퍼슨이 이중적이라는 말을 듣는 또 다른 이유는 겉으로는 자기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워싱턴에게 충성적인 척 하면서 뒤로는 워싱턴과 그 추종자들이 왕정체제로 바꾸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워싱턴이나 그의 측근들이 워싱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정계는 친영파이자 중앙(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파벌 (Federalist) 과 친불파로서 지방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파벌 (Republican) 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퍼슨은 후자의 당수 격이었다.  당시 신생 미국의 입장으로는 중앙정부가 제대로 서야 재정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나라가 유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버지니아 출신 제퍼슨은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를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 이유는 중앙집권 파가 득세하면 연방정부가 주정부에게 노예 폐지를 명령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버지니아를 포함한 남부 농업 중심 주들은 경제적으로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의해 연방 파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면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에 연방파 (중앙 집권주의자) 들이 왕정을 꿈꾸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근거 없는 명분을 들고 나온 것이다.

 

제퍼슨의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제퍼슨은 정략적으로 반대파들이 왕정체제를 꿈꾼다고 남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의 일부 보수인사들은 오바마가 공산주의자라고 믿는 것과 같은 심리 상태라고 보여진다.  제퍼슨같이 똑똑한 사람도 정적에 대하여 생각할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제퍼슨을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고 또 그래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정치인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중적이고 삼중적이고 또 다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후세 사람들이 존경할 정치적 위인을 만들려면 어느 정도 약점은 적당히 눈감아 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제퍼슨의 자기의 묘비에 (1) 독립선언서의 저자 (2) 버지니아 종교 자유 보장법의 저자 그리고 (3) 버지니아 대학의 창립자라고 쓰도록 했다.  제퍼슨이 미국 영토를 두배로 늘린 것을 자기의 주요 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솔직한 자기 평가이다.  미국 독립전쟁 직후 미국의 영토는 플로리다 뺀 동부 해안가와 근처 내륙 지방으로서 대충 현재 영토의 1/3 도 훨씬 못 미치는 정도였는데 당시 프랑스 소유였던 미국의 중부 지역을 나폴레옹으로부터 헐값 (2천만불 정도) 에 사들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퍼슨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가 태평양 건너 있는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서 팔아버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지금 같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만 제퍼슨은 자신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 같다.

 

또 제퍼슨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 종교에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 헌법에 신 (God) 이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이 점이 제퍼슨에 대해서 제일 맘에 드는 점이다.)  또 버지니아 대학을 만들면서 철저하게 비 종교적인 대학이 되도록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으로 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제퍼슨은 아예 버지니아 대학에 신학과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원래 미국의 국립 대학을 만드는 것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꿈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제퍼슨도 버지니아 대학을 국립 대학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지니아 대학은 대신 미국에서 가장 좋은 주립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서적:

Thomas Jefferson: Author of America by Christopher Hitchens 2005

American Creation: Triumphs and Tragedies at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by Joseph J. 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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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정의와 마음

심리학이 마음을 연구하는 학문이지 뭐겠는가? 이렇게 간단 명료한 답이 있는데 교과서를 보면 ‘행동과 정신적 처리 과정의 과학’ (The science of mental processes and behavior) 이라든지 그 비슷한 좀 복잡한 말로 심리학을 정의하고 있다.

심리학을 과학으로 정의하는 데는 물론 시비 걸고 싶은 생각이 없다.  과학은 이제까지 알려진 바로는 객관적이고 신뢰할만한 지식을 만들어내는 최선의 방법이다. 과학은 한마디로 여러 사람이 객관적으로 확인 할 수 있는 증거 (데이터) 와 논리에 의존하여 지식을 만들어 내는 방법을 지칭한다. 직관을 통해서 또는 명상을 통해서 얻는 지식은 물론 좋은 가설을 만들어 내는 방법이긴 하지만 데이터로 증명이 안되면 인정해 주지 않는 것이 과학이다.

또 과학이란 물론 기존의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다. 갈릴레오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고 하니까 그 말은 성경이라는 권위에 어긋나므로 틀렸다 라고 판정 받은 적이 있었다. 중력이라는 개념을 발견한 Newton 세대의 직전 까지도 대부분의 지적 논쟁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이렇게 얘기 했는데 그에 따라 논리적으로 연역해 보면 이러이러 하므로 내가 옳다” 라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무거운 것이 가벼운 것 보다 먼저 떨어진다’ 라던가 ‘물체는 밀면 움직이고 안 밀면 움직이지 않는다’ 라는 명제가 틀렸다는 것을 발견하는데 2000 년이 걸렸다. 상식적이고 그럴 듯 하게 들리고 아리스토텔레스 같은 유명한 철학자가 이야기 했기 때문에 그냥 믿었기 때문이다. 혈액형과 성격이 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없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혈액형 성격론을 믿는다.  한국 사람들은 종교건 미신이건 보약이건 객관적인 증거에 상관 없이 모두 다 잘 믿는 특성이 있는 듯하다.


심리학의 정의와 행동 주의


한때 대다수의 심리학자들이 심리학의 정의에서 마음이라는 단어를 빼 버려야 한다고 굳게 믿었던 적이 있었다. 소위 ‘행동 주의 (behaviorism)’ 의 전성시대 (대략 1920-1970 쯤) 가 그 때이다. 그래서 심리학은 '행동의 과학'  (The Science of the Behavior) 으로 정의되었다.  그 당시에 심리학자들이 보니까 다른 자연과학은 고속 성장을 하고 있는데 (1905년에 아인슈타인이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했다) 심리학은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는 것 처럼 보이니까 우린 왜 이럴까 라고 고민했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심리학자들이 ‘마음’ 이라는 주관적 현상을 공부하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행동주의 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왓슨 (John B. Watson 1878-1958) 이 심리학은 객관적으로 관찰이 가능한 행동(만)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라고 선언하니까 많은 미국 심리학자들이 거기에 동조하면서 심리학이 행리학이 되었다.

행동주의의 유행이 약해지면서 심적과정 (Mental Process) 라는 말을 심리학의 정의에 슬며시 다시 끼어놓았다. 그런데 아직도 마음이라는 말은 ‘조작적 정의’가 불가능 하므로 과학적 심리학에서 쓰지 말아야 된다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내 생각엔 '마음의 과학' 으로 간단히 심리학을 정의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음이라는 것은 기억, 감정, 의지 뭐 그런 것들을 통칭하는 말이다.  기억과 판단 기본적인 지각/인식이 가능한 기계 (컴퓨터) 가 발달된 이후 심리학자들은 마음이라고 부르는 여러가지 심적 과정을 어떻게 접근해야 하는지에 대하여 더 자신을 가지게 되었고 더 이상 심리학을 인간 행동의 과학으로 좁게 생각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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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의 창시자



대부분의 심리학 교과서들은 독일 사람 빌헬름 분트 (Wilhelm Wundt, 1832-1920) 를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다. 분트는 의학 공부를 하고 대학에서 생리학 (Physiology) 를 가르치다 생리심리학이라는 과목을 만들어 가르치면서 심리학 연구를 시작했다.  나는 '창시자' 라는 타이틀이 분트에게 좀 과분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한적이 있다. 사실 분트의 연구 업적 중에 요새까지 언급되는 것을 들어본 적이 없다. 또 분트 이전에도 심리학에 관련된 논의가 많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으로 올라가면 기원전부터 벌써 사상의학 비슷한 성격 이론 (humoral theory) 이 있었다. 이는 몸에 네 가지 물질이 있는데 그 중 한가지 (예를 들어 ‘검은 피’) 가 너무 많으면 우울증에 걸리므로 몸에서 검은 피를 빼내어 우울증을 치료하고 어쩌고 하는 좀 엉터리 심리 치료 이론이다. (그런데 이 이론이 19세기 말까지 2500 년간이나 많은 사람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칸트를 비롯한 많은 철학자들도 심리학적 문제를 연구했다고 볼 수 있다.  분트와 동시대에도 페크너 Gustav Theodor Fechner (1801-1887) 라든지 헬름홀츠 Hermann Ludwig Ferdinand von Helmholtz (1821-1894) (분트는 그의 조교를 지냈다) 같은 사람도 과학적 실험적 방법을 사용하여 심리학적 문제를 연구했다.

어쨌든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트가 그가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라는 거창한 영예를 얻게 된 주 이유는 최초로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어 과학적 (실험적) 인 방법으로 심리학에 관련된 문제를 연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가 심리학 실험실을 개설한 1879 년 --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해다 -- 을 현대 심리학이 시작한 해로 본다. 그깟 실험실 하나 만든 게 뭐 그리 대수냐 라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실험은 현대 과학이 이처럼 엄청난 발전을 할 수 있게 해 준 가장 중요한 연구 방법론 중의 하나이다.  분트는 또 최초의 심리학 저널을 만들고 많은 심리학 박사들을 배출하였는데 그들 중 일부가 미국에 와서 여러 주요 대학에 심리학과를 창설하게 된다.
 

분트가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하면 좀 섭섭해 할 사람이 미국 하바드 대학의 윌리암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이다. 한 열살 아래인데 미국에서 분트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었고 그의 기억에 대한 이론은 아직도 널리 쓰이고 있다. 미국의 유명한 소설가인 헨리 제임스와 형제 지간인데 실용주의를 창립한 철학자로도 유명하다.  윌리암 제임스는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분트보다 20 여 년 후에 태어난 프로이트 (Freud 1856 - 1939) 가 심리학의 창시자가 아닌가 라고 묻는 사람도 가끔 있는데 그는 정신 분석학 (Psychoanalysis) 의 창시자라고 할 수 있다. 정신 분석학은 심리학의 일부라고 볼 수도 있는데 심리 치료의 한 방법으로 시작되어 포괄적인 임상/성격 심리 이론으로 발전되어 왔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정말 과학적 근거가 있는지 그의 치료 방법이 정말 효과가 있는지에 대하여 아직도 논란이 되고 있지만 그의 이론은 대중적 인기를 바탕으로 현대 문화와 예술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지금도 영화나 TV 드라마를 보면 심리학이나 심리 치료에 관한 내용은 거의 모두 프로이트의 심리학과 관련되어 있다. 일반인들의 마음 속에 심리학자 그러면 제일 먼저 프로이트가 떠 오르지 않나 싶다. 프로이트는 좀 과대평가된 측면이 있다. (본 블로그 내에 올려진 글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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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종말 또는 혁명
 
드디어 주문했던 킨들 (Kindle 2) 이라는 전자제품이 도착했다.  킨들이라는 것은 말하자면 전자책이다.  엄밀히 말하면 전자화 (디지털) 된 문서를 읽기 위한 도구이다.  전자문서를 읽기 위한 도구로는 물론 컴퓨터가 있다.  그러나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서 책 같이 긴 문서를 오랫동안 읽기엔 좀 불편하다.   눈이 아픈 경향도 있고 목도 좀 그렇고 왠지 종이위에 인쇄된 책을 읽는 것 보다 불편하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긴 문서는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읽지 않고 프린트해서 읽는다.  그리고 물론 대부분의 책들은 컴퓨터로 볼 수 있도록 팔지도 않는다. 
 
미국의 대표적 인터넷 서점인 amazon.com 에서 만든 킨들의 첫번째 장점은 우선 종이위에 인쇄된 글자를 읽는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화면 자체에서 나오는 빛이 없다.  햇볕이나 전등불이 있어야  읽을 수 있다. (그래서 한번 충전한 배터리가 며칠 씩 간다).  또 글자 크기를 조정할 수 있어서 노안이 있는 사람들은 안경 없이 읽을 수도 있다.   내게 특히 편리한 것은 학술지에 실린 논문들을 대체로 PDF 형식으로 다운로드 받아 프린트해서 읽어 왔는데 이젠 프린트 할 필요없이 킨들에 PDF file 을 옮겨서 읽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아마존 회사에서 이메일을 통해 pdf file 을 킨들로 볼 수 있도록 무료로 포맷을 바꾸어 준다.  그러나 옛날에 발표된 논문들은 이미지 포맷으로 pdf 화 되어 있어서 Kindle 로 보면 너무 글자가 작다.
 
킨들의 첫인상은 아주 작다는 것이다.  두께는 타임이나 뉴스위크 메가진보다 조금 두꺼운 정도이고 크기는 한국 책방에서 주로 파는 책들의 크기보다 조금 작다.  자기전에 침대에 누워 읽기에 아주 가볍고 편리하다,  물론 화면은 더 작아서 미국 문고판 책 (Paperback) 정도의 크기이다.  작지만 키보드도 있어서 책 여백에 노트를 하듯 메모를 써놓을 수도 있고 밑줄도 그을 수도 있고 물론 찾기 기능도 있다.   책은 한권에 미화 $10 정도로 파는데 (킨들 자체는 $360 이다)  휴대전화 네트워크에 연결되어 있어 컴퓨터 없이 직접 다운로드 받을 수 있다.  읽고 싶은 책을 발견하면 몇초내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큰 매력 중 하나이다.  책값 외에 통신료는 무료이다.  책 뿐 아니라 여러가지 신문이나 잡지 블로그 등을 볼 수 있는데 그건 돈을 따로 내야 한다.  한국에 가지고 가면 물론 무선으로는 책을 살수는 없지만 인터넷과 컴퓨터를 통해 다운로드 받은 뒤 usb 코드로 전자책에 옮기면 된다.  킨들하나에 수천권의 책을 저장할 수 있고 지우더라도 한번 산 책은 다시 다운로드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저장 용량은 큰 문제가 되지 않을 것 같다.  한국에서 영어로 쓰여진 책을 구해 읽기엔 아주 적절하게 쓰일 수 있는데 대신 미국 크레딧 카드가 있어야 책을 구입할 수 있다 (판권 문제가 있는 모양이다).  킨들은 책을 읽어줄 수 있는 기능도 있다.  잠깐 들어보니까 단어 하나 하나는 명확하게 읽어주는데 기계가 읽는 것이라 소리의 높낮이가 없다. 그래서 문장이 끝나는지 시작되는지 감을 잡기가 어려운 문제가 있다.

 
아직은 전자책으로 읽을 수 있는 책 즉 소프트웨어가 한정되어 있다. 현재 Amazon.com 에 이십오만권 정도의 책이 있다.  (그래도 미국의 베스트셀러들은 거의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 킨들 같은 전자책은 점점 더 보급될 것이 거의 확실해 보인다.  한글 책도 기술적으로 전자책으로 만드는데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지금 출판 문화에 혁명이 시작되고 있는지 모른다.  킨들같은 전자책이 멀지않은 미래에 종이로 만든 책을 완전히 대체할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서점과 제지업과 인쇄업은 아주 축소될 것이다. 또 책 출판 비용도 아주 줄어들고 책값도 싸질 것이고 학생들 책가방도 아주 가벼워 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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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와싱턴

미국의 국부라고 불리는 조지 와싱턴 초대 대통령은 미 대륙을 서로 더 많이 차지하려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전쟁 (French Indian War) 에서 영국군에 소속되어 활약하면서 세상에 그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그 책에 의하면 공에 비해 좀 과분한 명성을 얻었다고 한다. 그러나 와싱턴은 식민지 출신 장교로서 진급이나 대우에 불만을 느끼기도 했다고 한다. 그후 젊은 와싱턴은 “버지니아에서 가장 돈이 많은 과부” 와 결혼하여 농장주가 되었고 거기에 전쟁에서의 공을 내세워 영국으로부터 더 많은 땅을 하사받아 보태어서 대지주가 되었다고 한다. 대 농장주로서 많은 노예를 거느리고 런던에서 최신 유행하던 물품을 수입하여 쓰며 귀족처럼 살던 워싱턴은 재배하던 담뱃값의 하락등으로 버지니아의 다른 농장주들과 함께 일종의 경영난을 겪게 된다. 거기에다 식민지에 불리한 영국의 세금과 토지 정책 등에 불만을 품게 된 워싱턴은 미국의 독립 전쟁에 참여하기로 결심한다.

워싱톤이 독립군 총사령관이 된 이유는 그의 전투 경험도 있고 당시 식민지에서 가장 비중있는 주였던 버지니아 출신의 비중있는 인사를 총사령관 자리에 앉혀 버지니아가 확실하게 독립전쟁에 동참하게 하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고 워싱턴의 체격과 키가 워낙 커서 총사령관의 어울리는 외모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거구에 과묵하고 체면과 명예를 중시하는 워싱턴 장군의 묘사에서 난 엉뚱하게 삼국지의 관우를 연상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관우의 인상은 고우영 만화에서 나온 것이다.)

자원자로 구성된 독립군은 군복도 제대로 없고 훈련도 받지 못해서 당시 세계 최강의 영국 정규군의 상대가 되지 못하였다. 독립군의 전술은 게릴라 식으로 영국군을 괴롭히면서 정면으로 싸우는 것을 피해 살아남는 것이었다고 한다. 사실 당시에 미국이 독립을 쟁취한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다. 당시 미국은 제대로 된 중앙정부 (즉 제대로 된 세금제도) 가 없어서 병사들에게 제대로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제공하지 못했다고 한다. 신발이 없는 병사들이 많아서 눈길을 행군을 하면 상처난 맨발에서 나온 핏자국이 길을 따라 생겼다고 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독립군 병사들은 밀린 월급을 주지 않으면 필라델피아로 쳐들어가 의회를 해산해 버리겠다고 위협했다고 한다. 어쨌든 워싱턴의 지도력에 힘입은 독립군의 버티기 (8년) 와 무엇보다고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의 도움이 승리의 주 요인이었을 것이다. 영국이 미국에서 패퇴한 것은 미국이 베트남에서 패퇴한 상황을 연상케 한다.

영국군이 미국을 포기하자 많은 사람들은 워싱턴과 그의 군대가 의회를 해산하고 정권을 잡지않을까 우려했다고 한다. 워싱턴에게 패배한 영국왕 조지 3세도 워싱턴이 미국의 왕이 될 것으로 예측했다고 한다. 그러나 워싱턴은 일단 깨끗이 물러나 역사에 자기가 어떻게 기록될까에 주로 신경쓰면서 은퇴 생활을 하다가 다시 만장일치로 미국 초대 대통령에 선출된다. 워싱턴에게 직계 후손이 없는 것이 워싱턴 왕조가 생기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달래는데 일조를 했다고 한다. 와싱턴은 3선을 시도했더라도 쉽게 당선되었을 것이지만 다시 깨끗이 물러났다고 한다. 워싱턴은 체면을 아주 중요시해서 대통령에 선출될 때나 독립군 총사령관에 선출될 때나 속으로는 야심이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주변에서 간청해서 어쩔 수 없이 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을 좋아했다고 그 책은 쓰고 있다.

미국 수도를 현 위치로 정한 것도 워싱턴인데 워싱턴에 가면 막상 워싱턴의 동상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워싱턴에 있는 제일 눈에 띄는 워싱턴 기념 조형물은 오벨리스크 (탑) 이다. 하긴 워싱턴의 얼굴이 모든 사람의 주머니 (돈) 속에 들어 있긴 하지만. 워싱턴 DC 에서 가장 눈에 띄는 동상은 링컨과 제퍼슨의 동상인데 제퍼슨은 워싱턴의 정적이었고 링컨은 워싱턴이 덮어둔 문제 (노예제도) 를 해결한 사람이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의 정신과 모순되는 노예제도에 대해서 복잡한 심정을 가지고 있었고 죽은 뒤에 자기가 소유한 모든 노예를 해방하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어쨋거나 워싱턴은 모든 미국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으면서 미국의 국부로서 추앙받고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두번의 임기를 마치고 깨끗하게 물러났다면 그런 대접을 받으며 만원짜리 위에서 그의 초상화를 볼 수 있었을까? 우리나라도 돈에 초상화 올릴만한 대통령 나올 때 (키워 줄 때?)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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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abric of the Cosmos by Brian Greene

 

일반인들을 위해 물리학 책을 구해 읽고 있는 이유는 이런 책들이 잠자리에서 읽다가 잠들기에 최상이기 때문이다. 소설은 너무 재미 있으면 읽다 밤새는 수가 생기고 타임 매가진 같은 시사 잡지는 페이지부터 끝까지 읽고 나도 정신이 말똥말똥하다. 하는 일과 관련된 책을 읽으면 복잡한 생각이 들어 잠이 오는데 도움이 안되는 수가 있다. 그러나 알듯 모를듯 물리학 책을 읽다 보면 재미있으면서도 복잡하기도 해서 읽다보면 스스르 잠이 들어 버린다.

 

학부때 물리학 교수 한분이 물리학이 만학의 왕이다 라는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그땐 자기 전공 분야이니까 저러는구나 싶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말도 일리가 있다. 물리학이라는 것이 어찌보면 학문 중에 제일 영양가 많은 학문인지도 모른다. 물리학이 발견해 법칙과 이론은 경제학이나 심리학같은 사회 과학이 만들어 이론이나 법칙에 비해 영향력이나 정밀성이 탁월하다. 뉴턴의 만유인력 법칙이나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생각해 보면 그만큼 멋있는 이론을 내놓은 학문 분야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간단하게 전기가 없는 생활을 상상해 보면 물리학이 세상에 미친 영향을 가늠해 있다. 증권회사에서 일해서 연봉 수천만불씩 받는 사람도 있다던데 그런 사람들 월급 주고 스티븐 호킹 같은 물리학자들 월급 올려줘야되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 적이 있다. 미국 물리학 박사들 자기 분야에서 직장 잡기가 어려워서 금융회사로 가서 증권거래 하는 것을 수학적으로 도와주는 일을 하는 사람도 많이 있다고 한다.

 

Brian Greene 이라는 사람이 The Fabric of the Cosmos 라는 책은 학교 도서관 신간 코너에서 눈에 띄어 고른 책이다. 책을 읽다보니 저자가 똑똑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표지를 열어 보니까 하바드 대학을 나와 로즈 스칼라 (이거 대단한 거다.) 옥스포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컬럼비아 대학에서 물리학 교수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몰랐는데Superstring (초끈?) 이론으로 유명한 사람인 모양이다. 생각에 훌륭한 학자는 어떤 지식 자체를 아는 아니라 지식이 다른 분야나 보다 넓은 차원에서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느냐에 대하여 얼마나 많이 이해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는데 저자가 그런 사람인 같다.

 

책은 대중을 위한 물리학 책인데 시작은 엉뚱하게 까뮈의 시지푸스의 신화에 대한 얘기로부터 시작한다. “진정한 철학의 문제는 하나자살의 문제이다 ( 인생은 살만한 가치가 있는가? 라는 문제이다). 세상이 3차원이건 아니건 마음이 9가지 종류가 있건 12가지 종류가 있건 그것은 부차적인 문제이다.” 과학자인 저자는 두번째 문장이 마음에 걸렸다고 한다. 우주의 구조와 본질을 이해하는 것이 인생이 살만한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에 대한 답을 주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책은 빌린 한참 되었는데 아직 반도 읽었다. 읽다 보면 잠이 너무 와서 진도가 더딘 이유도 있고 관심이 있는 책을 발견하면 책부터 먼저 읽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읽어논 것이라도 먼저 정리를 해놔야지 나중에 잊어버리겠다 싶어서 반쪽 독후감을 쓴다.

 

본론은 상대성 이론부터 시작하는데 알듯 모를 듯한 상대성이론은 책을 읽고 조금 알듯 쪽으로 가까워 같기도 하다. 이해라는 것이 여러가지 심적 상태를 나타내는 말인데 하나가 심적 모형을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3차원에 익숙해서 시공간의 4차원 세계가 머리 속이 그려지지가 않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저자가 제공하는 하나의 심적 모형은 아주 식빵 모형이다. 단면이 (2차원으로 단순화 ) 공간이고 식빵의 길이가 시간인데 식빵을 여러 각도에서 잘라 있다는 것이 시간이 상대적일 있다는 내가 보는 지금과 멀리 있는 사람이 보는 지금이 다를 있다는 - 이해하는데 도움이 있다.

 

하나 재미있는 비유는 우리가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축으로 빛의 속도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이다. 비유인지 실제로 그렇다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움직이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있다. 북쪽을 시간의 축이라고 생각하고 북쪽으로 시속 100km 달리는 차가 방향을 조금 틀어 북서쪽으로 100km 달려가면 (서쪽은 공간과 관련된 방향이다) 북쪽으로만 움직이는 측면을 보면 속도가 떨어지는 그것이 바로 움직이면 시간이 천천히 가는 이유가 된다는 것이다. 이해가 되는 같기도 하고 아닌 같기도 하다. 물론 움직이는 방향이 바뀌면 (예를 들어 남쪽으로) 시간이 움직이는 속도가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은 네번째 차원이니까 삼차원의 방향과 독립적일테니까.  어쨋거나 우리가 가만히 있어도 시간의 열차 괘도를 따라 빛의 속도로 가고 있다는 비유는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해준다.

 

그런데 물리학이 발견해 알쏭달쏭한 신기한 이야기는 상대성 이론 뿐이 아닌 모양이다. 마술처럼 떨어져 있는 입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입자의 행동이 사람이 특성을 알아내면 바뀐다고 한다. 상대성 이론만 이해하면 현대 물리학을 대충 이해한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읽었는데 산넘어 산이다. 번째 산을 넘지도 못했는데 뒤에 산이 있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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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었을돈도직업도없이고생한적이있던아인슈타인은상대성이론이세상에알려지고그의천재성을인정받기시작한30이후에는세상사람들의존경을받으며대체로팔자좋게살았던싶다. 히틀러때문에독일을떠나야했지만전까지만해도베를린시장이예산으로별장을아인슈타인에게50 생일선물로사주려했을정도였다고한다. (다른정치인들의반대로결국아인슈타인은자기돈으로별장을샀다) 독일에서쫓겨난뒤에는그를모셔가려고세계대학들이줄을섰다. 아인슈타인의조건은자기가인간계산기라고부르며데리고다니던수학자조수를정년보장된수학교수로채용하는것이었다고한다. 아인슈타인은오래전부터그를모셔가려고애써왔던캘리포니아공대(칼텍) 총장을실망시키면서뉴저지프린스턴에소재한고등과학원에정착한다.

 

아인슈타인은바람도많이폈던같다. 비서와주고받은연애편지가발견되기도하고아인슈타인의명성을듣고몰려온유럽의많은귀부인들과부인몰래데이트도많이했다고한다. 아인슈타인의둘째부인은그래서나중에비서를안전한여자로직접고용했는데비서는평생아인슈타인에게충성을다하는비서로일하게된다. 둘째부인과사별한뒤에사귄여자친구하나는소련의스파이였는데사실을아인슈타인은물론아인슈타인이공산주의자일것이라고의심하며감시하고있던연방수사국(FBI) 몰랐다고한다. 스파이여자친구가소련으로돌아간아인슈타인이보낸연애편지에는그녀가아인슈타인의머리를감겨준것을그리워하는얘기가있다고한다.

 

베를린대학교수로일할때나고등과학원에서일할때나아인슈타인은특별히정해진의무가없었던같다. 연구하라고수업부담도주지않았고연구비를따와야하는부담도없고연구주제도부담없이자기가하고싶은것을하는자리였던같다. 특허청에서일하면서시간을억지로내어연구할세상을뒤집어놓는업적을내놓았던아인슈타인은막상최상의연구환경에선그에비교될만한업적을내놓지못한다. 나이과학자는중요한연구업적을내놓지못한다는슬픈이론이적용되었던같다. 아인슈타인은양자물리학의발달초기엔많은기여를했지만그후양자물리학의주류를형성하는물리학자들이채택했던불확실성원리를싫어해서현대양자물리학연구에참여를하지않았다고한다. 불확실성의원리라는것이전자나양성자같은입자들의위치나움직임의속도등을확실하게없다는가정하에양자의특성에대하여연구하는것인모양인데아인슈타인은그것이맘에안들었던모양이다. 그래서말이신은주사위놀이를하지않는다이다. 아인슈타인은스스로를종교적인무신론자라고불렀는데사람의기도를들어주는인격신의존재를믿지않았지만과학이밝혀내는자연법칙에종교적인경외감을느꼈기때문이다. 아인슈타인은여생을상대성이론을확장하여양자역학과중력을함께설명하는통일장이론을완성하려고애썼지만끝내뜻을이루지못했다고한다.

 

아인슈타인은이념적으로중도좌파되는모양이다. 사회주의에호감을가지고있었지만개인적자유를아주중요시해서소련체제를비판했다고한다. 그러나한편으로는미국내에서극우세력(메카시즘) 용감하게공개적으로맞서기도했다. 그는평화/반전주의자로서나찌가독일정권을잡기전까지는징병거부운동을해서전쟁을막아야한다고주장했다. 핵폭탄이개발후에는군사력이있는강력한세계연방정부를만들어국가간의전쟁을막아야한다고주장했다. 아인슈타인과핵폭탄은각별한인연을가지고있다. 그의E = MC2 원리가되었고독일이원자폭탄을만들것이라는얘기를듣고미국대통령에게편지를보내원자폭탄개발을서두를것을종용한다. 그러나나중에독일이패전할때까지원자폭탄을만들지못하는것을보고그랬던것을후회했다고한다. 아인슈타인은원자폭탄을만드는직접참여하지는않았다. 미국정부는아인슈타인을믿지못해서정보가새어나갈까봐폭탄을만든다는얘기조차해주지않았다고한다.

 

아인슈타인은사망직후바로화장을하고묘지를만들지말라고유언을했다고한다. 그렇지않았다면세계적인성대한장례식이치뤄지고묘지도거창하게만들어져참배객들이줄을이었을텐데그것이싫었다는것이다. 그래서화장지엔버클리대학공대교수인아들과평생옆을지켰던비서등몇명만있었다고한다. 나라면그랬을같은데. 머리좋은말고도다른점이많은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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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인슈타인 - 3    상대성이론

그런데 상대성 이론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이 이론에 대하여 가장 유명한 수식이E = MC2 이다. 아마 세상에서 제일 유명한 수식이 아닌가 싶다. 에너지 (E) 가 질량을 가진 물체 (M) 로 변환될 수 있고 그 반대도 되는데 그럴 경우 빛의 속도 (C) 의 제곱으로 곱해지기 때문에 아주 조그만 질량의 물체라도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만들 수 있다. 이 수식이 핵 폭탄의 원리이다. 여기까진 뭐 별 어려운 지 모르겠는데 이것이 상대성이론의 핵심은 아닌 듯하다. 이 공식은 그 논문에 처음부터 실렸던 것도 아니고 나중에 아 그렇다면 이렇게 되겠구나 하고 떠 오른 공식이라는 것이다.

상대성 이론은 빛의 파동설과 빛의 속도에 관련된 문제를 풀다가 나온 이론인 듯 싶다. 빛을 파동으로 본다면 매개체가 있어야 한다. 파도에 물이 필요하고 음파를 전하기 위해서는 공기가 필요하듯이. 그래서ether 라는 가상적 매체를 설정해 왔는데Michelson 과Morley 라는 사람이 아주 기발하고 유명한 실험을 해서 ether 의 존재를 증명해 보려 했다. 그런데 ether 의 존재를 증명하는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자세하게는 모르겠는데 지구가 워낙 빨리 움직이고 있으니까 (초속 30 km 로 태양 주위를 돌고 있다고 한다. 거기다 자전도 하고 태양 자체도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그에 따라 빛의 속도가 달라질 것이다. 그런데 빛의 속도가 지구의 움직임과 관계 없다는 실험 결과를 얻었다는 것이다. 빛의 속도가 빛이 지구가 움직이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나 그 반대방향으로 움직일 때나 같다는 것이다. 이 결과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만들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빛의 속도가 광원의 움직임이나 관찰자의 움직임에 상관없이 일정하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지 잘 생각해 보면 직관적으로 이해가 잘 안될 수 있다. 왜냐하면 달리는 (밀페되고 투명한) 기차안에서 소리를 냈을 때 그 소리가 전달되는 속도는 기차 밖에서 측정한 소리의 속도와 다르기 때문이다. 기차 밖에서 측정한 소리의 속도는 기차안에서 측정한 소리의 속도에 (소리가 기차가는 방향으로 전달되는 경우) 기차의 속도를 더한 것이 될 것이다. 소리를 전달하는 메체인 공기 자체가 밀폐된 기차와 함께 달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빛의 경우에는 그렇지 않다는 것이다. 기차 안에서전구를 켠뒤 기차 안에서 빛의 속도를 측정하면 기차 밖에서 측정한 같은 빛의 속도와 같다는 것이다.

달리는 기차의 정 중간에서 전구를 키면 그 빛은 기차의 앞쪽 (가는 방향) 벽이나 뒤쪽 벽에 동시에 도착한다고 한다. 기차 안에서 측정한 빛의 속도가 일정하기 떄문이다. 그러나 기차 밖에서 빛의 속도가 일정하다고 가정하면 그럴 수가 없다. 기차가 가고 있기 때문에 기차 밖에 서있는 사람의 기준으로 속도가 일정한 빛은 기차의 뒤쪽 벽에 먼저 도착해야하고 기차의 앞 쪽 (기차가 가고 있는 방향) 벽에는 나중에 도달해야 한다. 기차가 앞으로 움직이고 있으니까. 이게 모순이 아닌가 말이다. 그런데 그것이 모순이 아닐 수 있는 이유는 기차 안에서 시간과 기차 밖에서의 시간이 다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기차 안에서 빛이 앞과 뒤의 벽에 동시에 도착했을 때 기차 안의 시계를 보니 0시 10초라고 하면 기차 밖의 시계로 보면 0 시 11초에 뒷 벽에 먼저 도착하고 0시 12초에 앞벽에 도착하는 것으로 관찰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아마 빛의 속도가 유한하고 움직이는 기차의 앞쪽이 기차 뒤보다 밖에 서있는 관찰자로부터 더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앞쪽에서 오는 빛이 도착하는데 더 오래 걸려서 그런 걸까? 상대성 원리에 의하면 절대적인 의미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까지가 대충 내가 이해 (오해?) 하고있는 특수 상대성 이론이다. 시간뿐 아니라 물체가 빨리 움직이면 크기도 변한다고 (줄어든다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빛의 속도에 대한 이론이 E = MC2 과 연결이 되는지는 모르겠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세상의 일이 다 상대적인 것이다 라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아인슈타인은 원래 이 이론을 불변성이론이라고 부르려고 했다고 한다. 빛의 속도같은 물리 법칙이 상대적 움직임에 따라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수 상대성이론은 이해해보려고 시도해 본 적이 있지만 일반 상대성 이론은 아예 시도도 해보지 않았다. 특수 상대성 이론이란 물체가 일정한 속도로 움직이고 있을 때에만 적용될 수 있는 이론이고 물체가 가속하거나 감속할 때를 포함한 일반적인 경우를 다 포함해서 설명하는 이론이 일반 상대성 이론이라고 한다. 이 일반 상대성 이론은 우주가 팽창한다는 사실도 예측했다는데 이 예측이 말이 안된다고 생각한 아인슈타인은 이 수식을 변경했다가 (cosmological constant) 나중에 정말 우주가 팽창한다는 관찰이 보고되자 내 인생 최대의 실수라고 땅을 치고 후회했다는 것이다. 그 옛날에 우주가 팽창한다는 전혀 상상도 못할 예측을 내놓았다가 나중에 정말 그 예측이 맞다는 것이 발견되었더라면 세상은 빛이 휘어서 태양에 가려진 별이 보인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 또 한번 (아마 그때 보다 훨씬 더) 아인슈타인의 천재성에 감탄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나중에 또 우주의 팽창을 막는 힘이 존재할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어 아인슈타인이 수식을 고친 것이 옳았을지도 모른다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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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instein -1

아인슈타인에 대한 전기는 참 많이 나와있다. 전에도 그에 대한 전기를 두세개 정도 읽은 기억이 있는데 또 새로 책이 나왔다고 해서 봤더니 아주 두꺼워서 여름 휴가 여행기간 동안 읽을거리가 떨어지는 일이 없을 것 같아 가방 속에 넣었다.


아인슈타인은 머리가 아주 좋은 것 빼고는 나와 비슷한 점이 많이 있다. 그는 사회 정의를 중요시하는 진보 성향이지만 개인의 자유를 아주 중요시 하기 때문에 독재 (좌익이건 우익이건) 를 아주 싫어한다. 같은 맥락에서 반골 기질이 있다. 그는 옛날부터 해왔다고 무조건 따라하는 것은 바보스럽다고 생각하고 기존 권위에 대한 반발심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교수들에게 건방을 떨다가 찍혀서 나중에 일자리를 찾는데 고생을 많이 한다. “게으른 개같은 놈” “나중에 아무짝에도 쓸모 없을 놈” 등등이 아인슈타인에 대한 교수들의 평가였다고 한다. 한 교수는 추천서에 아인슈타인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써서 오히려 일자리를 잡는데 방해를 했다고 한다. 한동안 아인슈타인은 동창생 중 유일하게 실업자가 되어 고등학생들을 가르치는 과외 선생같은 일도 했다.


아인슈타인은 또 수학은 별로 배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해서 대학시절 수업을 많이 빼 먹었는데 그 때문에 나중에 고생을 많이 하면서 수학 공부를 안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쓸 땐 같은 학교 (스위스 공과 대학) 동창생인 부인의 도움을 받기도 하고 나중에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할 땐 하마터면 다른 수학자에게 일반 상대성 이론의 완성자라는 영예를 빼앗길 뻔 했다. 특수 상대성 이론을 발표한 후 10년 정도 지나서야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했는데 수학을 더 잘했더라면 더 일찍 완성 시킬 수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일반 상대성 이론을 완성시키려고 애쓰는 단계에서 그 이론에 대하여 동료 수학자에게 이야기 했더니 그 수학자가 독자적으로 수식을 만들어 아인슈타인과 거의 동시에 발표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그 사실을 알고 막판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며 시간 경쟁을 해야 했다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이 어릴 때 아주 공부를 못했다거나 낙제생이라거나 하는 이야기는 과장된 것이다. 언어 발달이 좀 느리긴 했지만 어릴 때 부터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한다. 그러나 아인슈타인은 언어보다 그림으로 생각하는 타입이라고 한다. 그래도 아인슈타인은 아주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다. 엄격하고 암기위주의 교육을 중시하는 독일의 고등학교가 체질에 맞지 않아 중퇴하고 스위스로 가서 대학 시험을 남들보다 어릴 때 치렀는데 떨어지고 일년 재수해서 스위스 공대를 들어갔다 (독일에서 군대 가기 싫어 스위스로 갔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 당시 스위스 공대는 스위스에서 제일 좋다고 하는 대학은 아니었다고 한다. 나중에 아인슈타인이 박사학위를 받을 때 당시 스위스 공대는 박사학위를 줄수있는 대학이 아니어서 스위스의 다른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졸업 성적도 졸업생들 중 바닥에 가까웠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머리는 좋은데 공부를 안하는 타입” 이었던 것 같다.


친구의 도움으로 간신히 스위스 특허국 말단 심사원으로 취직했는데 머리가 좋은 아인슈타인은 자기가 할일을 금방 해치우고 물리학 논문을 썼다고 한다. 마음 좋은 직장 상사가 봐주기도 했고. 특허국에서 일하면서 아인슈타인은 물리학계를 뒤집어 놓게 되는 특수 상대성이론에 대한 논문과 나중에 노벨상을 받게되는 빛의 입자설에 대한 논문을 포함하는 주옥같은 논문 네편을 1905 년에 한꺼번에 발표하고 박사학위를 받는다. (그 땐 박사학위라는 것이 논문만 써서 통과되면 되는 모양이다.) 논문들을 발표하면서 아인슈타인은 금방 교수자리 제의가 들어올 것이라고 기대를 많이 했다고 한다. 그러나 별 반응이 없자 실망을 많이 했다 한다.  고등학교 선생님 자리에 특수 상대성 이론에 대한 논문을 포함시켜 지원서류를 보냈는데 그것도 떨어졌다고 한다. 그 뒤 3년이 지나서야 간신히 대학에 포스트 닥 같은 자리를 얻었는데 월급이 작아서 특허국 일과 병행해야 했다. 그러나 결국에 그의 가치를 알아차린 유럽의 명문 대학들이 그를 스카웃하러 경쟁하게 되면서 여러 대학을 조건 좋은 곳을 골라 옮겨 다니게 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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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위 불안 (Status Anxiety)

알랭 드 보통 (Alain De Botton, 발음을 내가 제대로 한 건지는 모르겠다.) 은 사회적 지위 (status) 를 다른 사람들이 나의 가치와 중요성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 하는 가로 정의하고 겉으로는 안 그런 척 해도 이런 사회적 지위에 대하여 사람들은 아주 신경을 많이 쓰고 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지위를 높이려 애쓰고 또 떨어질까 봐 불안해하고.

지위 불안의 원인은 첫째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 하는 강한 욕구 때문 이라고 보통은 주장한다. 사람들에게 가장 잔인한 형벌은 사회에서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것이라는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인 윌리엄 제임스의 말을 인용하면서 많은 사람들에게 세상으로부터 인정받고 사랑 받는 것은 개인적/성적 욕구의 추구와 더불어 가장 중요한 욕구 중 하나라는 것이다.

지위 불안의 두 번째 원인은 현대에 들어와 사람들의 기대 수준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신분이 태어날 때 결정되어 고정되어 버리는 옛날 계급 사회 때는 사회적 지위가 본인의 의지나 노력에 의해 결정되지 않았지만 현대 사회엔 원칙적으로 '평등 사회' 가됨으로서 자기와 비교가 되는 '준거 집단' 의 범위가 넓어지고 '누구나 맘만 먹고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라는 믿음이 더욱 지위 불안을 가중 시켰다는 것이다. 더구나 산업 혁명 이후 사회가 전반적으로 과거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고 세습적 계급이 없어지면서 돈이 지위를 나타내는 가정 중요한 수단 중의 하나가 되었다.

그래도 예전에는 가난하다는 것이 지위 불안 같은 심리적 불만을 덜 야기 하였는데 그런 배경에는 세 가지 오래된 '이론' 가 있다.

(1) 가난한 사람들이 가난한 것이 자기 책임이 아닐 뿐더러 가난한 사람들은 사회에서 가장 유용한 사람들이다. 예를 들어 농민들이 땀 흘려 곡식을 수확하기 때문에 부자들도 먹고 사는 것이다.

(2) 지위가 낮은 것이 도덕적 열등감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가난했고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만큼 어렵다.

(3) 부자는 악하고 타락한 사람들이고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해서 부자가 된 것이다. 이런 믿음에 대하여 저자는 루소와 맑스를 인용한다.

그러나 현대 사회엔 그에 맞서는 다른 세 가지 이론이 생겼다. 이 이론들은 지위 불안을 가중 시키는 이론들이다.

(1) 가난한 사람들이 아니라 부자들이야 말로 사회에 유용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저자는 아담 스미스를 인용하는데 부자들의 욕심과 탐욕은 오히려 사회 전체적 부를 증가시키고 가난한 사람들의 일자리를 마련해 준다는 이론이 그 중 하나이다.

(2) 현대는 능력 위주 사회 (meritocracy) 이다 그러므로 지위는 도덕적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지위가 높은 사람은 재능이 있고 부지런한 사람이다.

(3) 가난한 사람들은 게으르고 멍청한 사람들이다. 여기서 저자는 자수성가한 '철강왕' 카네기를 인용한다. 그는 자선 사업을 하긴 했지만 술 취하고 게으른 가난한 사람들 도와주는 것에 대하여 부정적으로 보았다.

지위 불안을 가중 시키는 원인으로 저자는 또 사람들의 속물근성을 든다. 사람들이 자기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은 우러러 보고 지위가 낮은 사람은 깔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속물근성이 큰 사람일수록 남들이 자기의 지위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 걱정을 더 많이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 지위를 나타내는 가장 큰 수단 중 하나는 비싼 것들을 소유하고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면 이런 지위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해결책은 무엇인가?

철학적인 해결 방법으로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무시하는 방법이 있다. 사실 일반 대중들의 의견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다. 사실 우매한 대중이라는 말이 있듯이 많은 사람들의 의견은 사실 틀릴 때가 많다. 저자는 이에 대하여 쇼펜하우어를 인용한다. "지구에는 대화를 나눌만한 가치조차 없는 사람들로 우글거린다." . " 만일 소리를 아예 듣지 못하는 청중들이 연주가 끝난 뒤에 크게 박수를 친다면 음악가는 기분이 정말 좋을까?"

예술에서 위로를 찾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거의 모든 예술 작품의 주제는 기존 사회에서 누가 더 중요한 사람인가에 대한 가치 체계에 대한 비판이요 도전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정치적 여론을 바꾸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이상적인 인간형은 시대에 따라 변해 왔다. 에를 들어 기원전 400년 경 스파르타에선 공격적이고 싸움 잘하고 양성애 적이고 비 가정적인 전사가 이상적 인간형 이었고 중세 유럽에선 예수의 가르침을 따르고 살생을 피하는 성자 (Saint) 적 사람이 이상적 인간형이었다가 중세 후기엔 이슬람교도들을 잘 죽이는 기사가 이상적 인간형이 되었다. 근대 영국에선 춤 잘 추고 연애 잘하는 신사 (Gentlemen) 가 이상적 인간형이었고 현대엔 자기 능력으로 돈 잘 버는 사람이 이상적 인간형으로 취급된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사람들이 돈 잘 버는 것이 곧 똑똑하고 용기 있고 창의적이고 끈질긴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종교도 지위 불안을 달래는 하나의 방법이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평생을 남들이 인정해 주는 성공적인 사람으로 살아오려고 애쓰고 또 어느 정도 그것을 달성한 사람이 갑자기 병을 얻어 죽음을 생각하게 되자 자기가 이루어 왔고 또 이루고자 했던 것들이 얼마나 덧없었는지를 느끼는 이야기를 다룬 톨스토이의 소설 (The death of Ican Ilyich 1886) 을 예로 든다.

지위 불안을 달래는 마지막 방법으로서 저자는 보헤미아 (Bohenmia) 에 대하여 얘기한다. 원래 집시를 의미했던 보헤미아라는 말은 19 세기 초반 당시 부르주아 적 가치관에 반발하는 새로운 집단의 사람들을 지칭하는데 그들은 돈이나 사업 물질적 성공에 대하여 신경 쓰지 않고 감정에 충실하고 예술을 중시하고 성적으로 개방된 사람들이었다. 보헤미안들은 누가 사회적으로 존경 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인지에 대하여 당시 부르주아 계급의 가치관에 반발했다. 보헤미안들에게 이상적인 인간형은 사회에서 존경받는 좋은 직장에서 뛰쳐나와 글을 쓰거나 그림을 그리거나 음악을 만들고 친구나 가족들과 시간을 보내고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이다. 어떤 사람은 20 세기 초 뉴욕의 그린위치 빌리지를 진정한 보헤미아라고 불렀는데 그 이유는 그곳이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다. (Duchamp 1915)

소로우 (Henry Thoreau 1845) 의 월덴 (Walden) 이라는 작품은 19 세기 미국의 보헤미아 정신을 대표하는 작품이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다는 것은 꼭 인생이라는 게임에서 실패한 패배자라는 뜻이 아니라 돈 버는 것 말고 다른 목적을 위해 에너지와 시간을 집중한 사람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헤미안들도 자기 주변 사람들의 의견에 대하여 전혀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자기와 비슷한 사람들을 친구로 삼기도 하고 한군데 몰려 살기도 한다.

보통은 끝으로 지위 불안의 해결은 가치 기준의 다양화에 있다고 쓴다. 사회적 지위나 인정이 꼭 하나의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고 한 개인은 그 중 어떤 기준을 선택할지에 대하여 자유로워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 사람의 인생이 성공 했는지 실패했는지에 대하여 어떤 시대 어떤 사회에서 다수가 채택하고 있는 기준 (현재는 물질적 성공) 에 대하여 비판적이고 대안적인 가치 기준이 존재하고 또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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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럼독과 색계  -- 영화 두편

 

슬럼독 밀리어네어(Slumdog Millionaire, 2008) 라는 영화와 색계 (2007) 라는 영화는 물론 아무 관계도 없다.  내가 최근에 비슷한 시기에 영화를 보았을 뿐이다. 극장에서 슬럼독은 재미있게 보긴 했지만 미국의 양대 영화상 (아카데미 상과 골든 글로브 ) 휩쓸지는 몰랐다.  영화의 기본적인 플롯은 가난한 사람이 고생 끝에 부자도 되고 사랑도 얻는다는 어떻게 보면 진부할 정도로 고전적이고 단순한 플롯이다.  그럼에도 영화가 재미있고 많은 주목을 받는 이유는 영화가 인도 빈민들 특히 빈민가의 아이들의 생활상과 사회의 문제점을 고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종교 분쟁으로 허무하게 엄마가 살해 당하는 장면이나 고아 아이들을 이용해 돈을 버는 장면들이 인상적이다.  영화가 미국에서 이처럼 크게 흥행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아서 처음엔 미국 일부 극장에서만 상영했었다.   영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관심은 미국 사람들이 겪고 있는 경제난과 관계가 있을까?  아니면 미국 사람들의 의식이 백인 중심의 문화를 벗어나고 있다는 의미일까?

 

색계는 DVD 구해놓고 오랫동안 보지 않고 있던 영화이다.  포르노 같은 장면이 나온다는 얘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런 영화가 재미있지 않을 것이라는 선입견 같은 것이 있었다.  그러나 취향엔 색계가 슬럼독보다 훨씬 감동적인 영화이다.  아마 내가 사실주의적인 영화를 좋아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고 식민지 시대 항일 투쟁하는 중국 사람들의 이야기가 한국 사람인 내게 다가와서인지도 모른다.  포르노에 가까운 성관계의 묘사는 여자 주인공이 결국 친일파 남자 주인공에게 정을 주게 되는 이유를 설명하는데 필요했을 것이다.  허진호 감독의 행복 (2007) 이라는 영화와 함께 사람 심리를 사실적으로 묘사한 영화로서 근래에 영화 제일 만든 영화로 꼽고 싶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대충 생각나는 영화 Top 10)

 

행복 (2007)

색계 (2007)

밀양 (2007)

동감 (2000)

Doctor Zhivago (1965)

My Life as A Dog (1985)

Amadeus (1984)

Gone With the Wind (1939)

Forrest Gump (1994)

Titanic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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