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불짜리 사나이 - 알렉산더 해밀튼 

 

알렉산더 해밀튼  Alexander Hamilton (1755 – 1804)이라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실 별 관심이 없었다.   어차피 미국에 사는데 미국 역사에 대해서 좀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워싱턴의 전기를 읽고 난 뒤 미국의 건국사에 관심이 생겨서 워싱턴 다음으로 유명한 미국 3 대 대통령 제퍼슨의 전기를 오디오 북으로 된 것으로 찾았는데 못 찾고 대신 찾은 것이 해밀튼의 전기였다.  마지못해 시작한 책인데 종종 그렇듯이 읽다 보니 재미가 붙은 책이다.  이 사람의 일생도 웬만한 소설보다 더 파란만장하다.

 

미국의 초대 재무장관 해밀튼은 미국의 여러 건국 공신들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사람들 중 하나로 꼽히는 사람이다.  미국 사람들은 워싱턴 한 사람만을 국부라고 부르는 것이 아니라 제헌의회나 독립선언에 참여한 여러 사람들을 모두 국부들 (Founding Fathers) 이라고 부르는데 해밀튼은 그 중에서도 거의 다섯 손가락에 안에 드는 사람이다.   워싱턴 (1 대 대통령) , 벤자민 프랭클린, 제퍼슨 (3 대), 아담스 (2 대), 메디슨 (4 대 대통령) 과 동렬에 드는 것이다.  이들 중 벤 프랭클린은 너무 나이가 많아서 대통령이 될 수 없었고 해밀튼이 대통령이 되지 못한 이유는 아마도 “꽃뱀 스캔들” 때문인 것 같다.

 

해밀튼은 출생부터 아주 드라마틱하다.  중남미에 위치한 영국령 서인도 제도 섬에 살던 해밀튼의 모친은 아주 미녀였는데 해밀튼 할머니의 강권으로 아주 젊은 나이에 아주 나이 많은 유대인과 결혼했다.  물론 돈 때문이었다.  남편의 구박이 먼저였든지 아내의 바람이 먼저였는지 모르겠지만 남편은 젊은 아내를 간통 혐의로 감옥에 가둔다.  해밀튼이 모친은 감옥에서 나오자 마자 남편을 피해 다른 섬으로 도망가서 새로운 남자를 만나 해밀튼을 낳았다.  그러나 전 남편이 끝내 법적으로 이혼을 해주지 않아 해밀튼은 결국 법적으로 사생아로 남게 되고 평생 그 꼬리표 (Bastard) 가 따라 다닌다.  게다가 해밀튼은 아버지의 친구의 아들과 너무 닮아서 사람들이 혹시 바람기가 있던 해밀튼의 모친이 자기 남편 친구와 바람을 피워 낳은 애가 해밀튼이 아닌가에 대하여 논란도 있다고 한다.

 

부모가 일찍 죽어 고아가 된 해밀튼은 가게의 점원으로 일하다 신문에 글을 투고했는데 그 글 솜씨에 감탄한 독지가들이 장학금을 대주어 뉴욕의 킹스 칼리지 (지금의 컬럼비아 대학) 로 유학을 가게된다.  대학생 때 미국 독립전쟁이 일어나자 독립 전쟁을 지지하는 글을 신문에 발표하며 참전한 해밀튼은 워싱턴의 눈에 들어 그의 당번병 겸 비서실장 역할을 수행한다.   지난 글에 썼던 라피옛이 당시 워싱턴 수하에 있었는데 비슷한 또래인 해밀튼과 아주 친한 친구가 되었다고 한다.

 

전쟁이 끝나자 해밀튼은 학교로 돌아가 공부를 마치고 변호사가 되고 뉴욕을 대표하여 제헌 의회에 참여한다.  존 아담스 (2대 대통령) 와 토마스 제퍼슨 (3대) 이 독립전쟁 당시 독립선언문을 발표한 의회의 중심 인물이었던 것처럼 해밀튼은 제임스 매디슨 (4 대 대통령) 과 함께 독립 성취 후 헌법을 만든 제헌 의회의 중심 인물이 된다.  초대 대통령에 만장 일치로 추대된 와싱턴은 자기의 비서실장 출신의 해밀튼을 초대 재무장관에 임명한다.  당시 전쟁으로 빛더미에 올라있던 미국의 행정부에서 재무부는 가장 중요하고 힘 있는 자리로서 사실상 총리 급의 위상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재무부 장관 해밀튼은 국립 은행을 설립하는 등 미국 경제체제에 커다란 발자국을 남긴다.  지금 미국의 총리 급 장관은 국무장관이다.  당시 국무 장관은 제퍼슨이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당시 미 국무부는 비서를 포함해 전체 인원이 다섯명 정도였다는 것이다.

 

미국의 2인자가 된 해밀튼은 바람이 난다.  (많은 남자들은 권력을 잡으면 바람을 피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그런데 하필 꽃뱀 부부팀에 걸려 내연녀의 남편에게 협박도 받고 돈도 뺏기고 했다고 한다.  (18세기 미국에도 꽃뱀이 있는 줄은 몰랐다.)  재미있는 것은 그럼에도 당장 관계를 끊지 않았다는 것이다.   관계를 끊으려 하면 남편 (기둥서방?) 이 편지를 보내 관계를 계속할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이 남편은 나중에 해밀튼이 정말 관계를 끊고 돈 보내는 것을 중단하자 꽃뱀 아내와 이혼했다. 이 기둥 서방이 나중에 다른 사기 혐의로 감옥에 갇히자 해밀튼의 비리에 대한 정보를 이용해 감옥에서 나오려 하면서 해밀튼의 스캔달은 먼로 (5 대 대통령) 등 정적들의 손으로 넘어간다.  사실 해밀튼의 정적들은 워싱튼의 총애를 받으며 2 인자로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른 헤밀튼이 재무 장관 직을 이용해 부정축재를 했을 것으로 의심했다 한다.  해밀튼은 먼로들을 개인적으로 불러 자기의 치부를 공개하고 눈 감아줄 것을 부탁한다. 자기들이 생각하던 비리가 아닌 것을 깨달은 정적들은 신사적으로 그 일을 묻어둘 것을 약속하는데 나중에 결국 그 비밀은 세상에 알려진다. 

 

그 일로 재무장관 자리에서 물러나지만 그래도 정계에 대한 영향력이 남아있어 2대 3대 대통령 선거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한다.  3 대 대선 때 제퍼슨과 애론 버 (Aaron Burr, Jr. 1756 – 1836) 가 선거인단 표에서 동수를 기록해서 미 하원에서 재투표를 여러 번 한 뒤 가까스로 제퍼슨이 대통령이 되고 버는 부통령이 된다.  그런데 그렇게 되는데 해밀튼이 영향력을 행사한 모양이다.  그때부터 해밀튼에게 나쁜 감정을 갖게 된  애론 버는 후에 해밀튼이 자신에게 대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나쁘게 얘기했다고 결투를 신청한다.  해밀튼은 결투에 대하여 묘한 철학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명예를 지키기 위해 결투를 피하지는 않지만 결투에 임해서는 상대방을 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애론 버는 결투를 위해 사격 연습까지 하지만 해밀튼은 자기는 상대방을 쏘지 않을 것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만일을 대비해 유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결국 이 결투에서 해밀튼은 치명상을 입고 며칠 후 사망한다.  기가 막힌 것은 해밀튼이 죽기 3년전 해밀튼의 아들도 똑같은 이유와 상황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장래가 촉망되고 잘 생긴 해밀튼의 아들도 결투 신청을 받는데 결투는 하되 상대방은 쏘지 않는다는 철학 때문에 죽었다고 한다.  해밀튼의 아내는 큰 아들과 남편을 모두 결투 때문에 잃은 것이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애론 버는 결투에선 이겼지만 해밀튼의 살인범으로 몰려 정치 생명도 끝나고 일종의 유배 생활에 들어간다.  사망한 해밀튼은 사람들의 동정심 등으로 영웅으로 추대되고 그의 이름을 딴 해밀튼 칼리지도 생기고 컬럼비아 대학엔 그의 동상과 기념관 등이 만들어 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미국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지폐 중 하나인 10 불 짜리 지폐 위에 초상화를 남긴다.   (그 보다 더 많이 쓰이는 1불 짜리 위엔 워싱턴이 5불 짜리 위엔 링컨이 있다.)

참고:

Alexander Hamilton
by Ron Chern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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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대통령들 (3). 토마스 제퍼슨

 

미국 최고의 대통령이 누구인가에 대하여선 시시 때때로 실시되는 여론조사도 있고 역사학자 같은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조사도 있는데 대체로 링컨, 워싱턴, 루즈벨트 (프랭클린) 의 뒤를 이어 제퍼슨 (Thomas Jefferson, 1743 – 1826) 이 거론된다.  제퍼슨이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대체로 두가지가 거론되는데 미국 독립 선언서의 저자라고 인식과 미국의 영토를 두배로 늘렸다는 것이다. 

 

3 대 대통령 제퍼슨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초안자인 것에 대해서는 물론 이견이 없지만2 대 대통령 아담스의 의견대로 그가 독립 선언이라는 역사적 사건에서의 역할이 실제보다 과대 평가된 것은 사실이라고 보여진다.  아담스를 포함한 식민지 의회 지도자들은 먼저 벤자민 프랭글린에게 초고를 부탁했는데 프랭클린은 자기 원고가 의원회의 수정을 거치는 것이 싫다고 거부했고 아담스 자신은 “더 중요한 일” 때문에 바빠서 젊은 제퍼슨에게 맡기었다고 한다.  나중에 사람들이 제퍼슨을 독립선언문의 저자라고 떠 받드는 것을 보고 후회했을 것이다. 

 

독립선언서라는 것의 주 내용은 영국왕이 미 식민지에 대하여 실시한 여러가지 불공정한 정책을 나열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당시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에 대하여 반대하는 미국인들이 많아서 그들을 설득하는 것이 주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제퍼슨은 독립선언문 초반부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고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삶에 대한 권리와 자유에 대한 권리와 행복 추구권을 가지고 있다” 라고 쓴다.

 

We hold these truths to be self-evident, that all men are created equal, that they are endowed by their Creator with certain unalienable Rights, that among these are Life, Liberty and the pursuit of Happiness.


이 구절은 당시에 유행하던 계몽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그냥 멋을 내려고 쓴 것인지도 모르고 선언 직후엔 별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결국 프랑스 혁명의 사상적 바탕이 되고 전세계적으로 왕정 대신 민주주의가 정치체제의 주류가 되는 기폭제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막상 제퍼슨이 이런 평등 논리를 신봉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입으론 만민 평등을 얘기하고 장기적으로 노예 제도가 없어지길 바란다고 얘기하였지만 스스로는 노예를 소유하고 있었고 실제로 대통령이 되어서는 노예제도를 유지하는 쪽으로 국가 정책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제퍼슨의 사람됨을 “이중적” 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제퍼슨은 노예들을 집 안팍 일만 시킨 것이 아니라 침대 위에서도 일을 시켜서 여러명의 아이를 낳았다.  제퍼슨의 침실 노예겸 소실은 샐리 해밍스라는 여자인데 사별한 아내의 이복 동생이자 몸종이었다고 한다.  샐리 해밍스의 아버지가 제퍼슨의 장인이었고 어머니가 장인 소유의 노예였다는 것이다.  샐리 헤밍스는 “아주 놀라울 정도로 매력적” 이었다고 한다.   제퍼슨이 해방시킨 유일한 노예는 헤밍스 사이에서 태어난 자신의 아이들이었다. 

 

제퍼슨이 이중적이라는 말을 듣는 또 다른 이유는 겉으로는 자기를 국무장관에 임명한 워싱턴에게 충성적인 척 하면서 뒤로는 워싱턴과 그 추종자들이 왕정체제로 바꾸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비방하고 다녔다는 점이다.  (실제로 워싱턴이나 그의 측근들이 워싱턴을 왕으로 추대하려고 했다는 증거는 없다고 한다.)  당시 미국의 정계는 친영파이자 중앙(연방)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자는 파벌 (Federalist) 과 친불파로서 지방 (주) 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려는 파벌 (Republican) 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제퍼슨은 후자의 당수 격이었다.  당시 신생 미국의 입장으로는 중앙정부가 제대로 서야 재정적으로도 안보적으로도 나라가 유지 될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 버지니아 출신 제퍼슨은 중앙정부의 권한 강화를 기를 쓰고 반대한다.  그 이유는 중앙집권 파가 득세하면 연방정부가 주정부에게 노예 폐지를 명령할 가능성이 있고 그러면 버지니아를 포함한 남부 농업 중심 주들은 경제적으로 파산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예제도를 유지하기 의해 연방 파에 대해 반대한다고 하면 명분이 서지 않기 때문에 연방파 (중앙 집권주의자) 들이 왕정을 꿈꾸기 때문에 반대한다는 근거 없는 명분을 들고 나온 것이다.

 

제퍼슨의 이야기는 두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첫째 제퍼슨은 정략적으로 반대파들이 왕정체제를 꿈꾼다고 남들에게 말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다고 믿었다는 점이다.  지금 미국의 일부 보수인사들은 오바마가 공산주의자라고 믿는 것과 같은 심리 상태라고 보여진다.  제퍼슨같이 똑똑한 사람도 정적에 대하여 생각할 때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사람들을 실제보다 훨씬 더 부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두 번째로 제퍼슨을 이중적이라고 볼 수 있고 또 그래서 나쁘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따지고 보면 모든 정치인들이 아니 모든 사람들이 이중적이고 삼중적이고 또 다중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국에서도 후세 사람들이 존경할 정치적 위인을 만들려면 어느 정도 약점은 적당히 눈감아 줄 필요가 있지 않나 싶다.

 

제퍼슨의 자기의 묘비에 (1) 독립선언서의 저자 (2) 버지니아 종교 자유 보장법의 저자 그리고 (3) 버지니아 대학의 창립자라고 쓰도록 했다.  제퍼슨이 미국 영토를 두배로 늘린 것을 자기의 주요 업적으로 생각하지 않은 것은 어떻게 보면 솔직한 자기 평가이다.  미국 독립전쟁 직후 미국의 영토는 플로리다 뺀 동부 해안가와 근처 내륙 지방으로서 대충 현재 영토의 1/3 도 훨씬 못 미치는 정도였는데 당시 프랑스 소유였던 미국의 중부 지역을 나폴레옹으로부터 헐값 (2천만불 정도) 에 사들인 것이다.  따지고 보면 제퍼슨이 잘해서라기 보다는 프랑스가 태평양 건너 있는 땅을 관리하기 어려워서 팔아버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는 미국이 지금 같은 대국이 될 수 있는 발판이 되었지만 제퍼슨은 자신의 대표적 업적이라고 여기지 않은 것 같다.

 

또 제퍼슨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한 종교에 예속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 미국 헌법에 신 (God) 이라는 단어 자체가 들어가지 못하도록 하는데 일조했다고 한다. (이 점이 제퍼슨에 대해서 제일 맘에 드는 점이다.)  또 버지니아 대학을 만들면서 철저하게 비 종교적인 대학이 되도록 신경을 썼다고 한다.  그때까지의 전통적으로 대학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성직자를 양성하는 것이었는데 제퍼슨은 아예 버지니아 대학에 신학과도 만들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원래 미국의 국립 대학을 만드는 것은 초대 대통령 워싱턴의 꿈이었다고 한다.  워싱턴은 그 꿈을 이루지 못했고 제퍼슨도 버지니아 대학을 국립 대학으로 만드는 데는 실패했지만 버지니아 대학은 대신 미국에서 가장 좋은 주립 대학 중 하나가 되었다.

참고서적:

Thomas Jefferson: Author of America by Christopher Hitchens 2005

American Creation: Triumphs and Tragedies at the Founding of the Republic
by Joseph J. 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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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2 대 대통령 존 아담스

미국의 초대 대통령은 물론 조지 워싱턴이다.  이 사람은 키가 아주 크고 (6 피트 3 인치 한 190cm  정도) 풍채가 좋고 체면을 아주 중시하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야심이 있어도 겉으로는 늘 마지못해 다른 사람들의 간곡한 요청에 의해서 관직을 맡는듯한 모양을 취했다.  자신의 역사적 평가를 항상 염두에 두고 있었고 그래서 죽을 때 유언을 통해 자기가 소유한 노예들을 모두 해방시키도록 했다.  워싱턴을 비롯한 미국의 건국자들은 모든 사람들이 태어날 때부터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권리가 있다는 이념을 내세우며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했지만 그러면서도 노예제도를 유지하고 스스로도 수백명씩의 노예를 소유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워싱턴은 정규 교육을 받은 적도 없고 책 읽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또 그렇게 뛰어난 야전 지휘관도 아니어서 승리한 전투와 패배한 전투가 반반 정도이고 자기 자신의 전략과 지휘로 대승을 거둔 전투도 없다.  그러나 이 사람의 훌륭한 점은 아무리 생각해봐도 도무지 승리의 가망이 없는 독립전쟁에서 군복도 없는 자원군 출신 오합지졸을 맡아 별 예산도 없이 (당시 세금이 싫다고 반기를 든 미국인들에게 임시 의회가 세금을 걷기가 어려웠다) 당시 대영제국의 정예군 (지금의 미군과 비교할 수 있을 것이다) 과 맞서 9년 동안 싸우며 버티었다는 점이다.  풍채 좋고 왕 같은 위엄이 있는 워싱턴이 흔들림 없이 (최소한 겉으로는) 중심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헐벗고 춥고 굶주린 병사들이 그만 바라보고 흩어지지 않아 군대가 유지되었던 것이다. 신발이 없는 병사들도 많이 있어 행군을 하면 눈 위에 핏자국이 남던 시절이었다. 

2대 대통령 존 아담스는 워싱턴과는 반대 타입이다.  하바드에서 정규 교육을 받고 머리가 좋은 재사였지만 크지 않은 키 (170cm 정도) 에 대머리에 배가 나오고 성질이 급하고 감정적인 사람으로서 워싱턴 같은 위엄은 없었다. 워싱턴 행정부에서 초대 부통령을 지낸 후 토마스 제퍼슨을 간신히 몇표차로 이기고 대통령에 당선되었지만 재선땐 제퍼슨에게 패배한다.  제퍼슨과 평생 라이벌 관계였던 아담스는 후에 역사가들이 제퍼슨을 워싱턴과 함께 대표적인 건국 공신으로 추앙할 것을 예상했고 그에 대하여 질투를 느꼈다고 한다.  아담스는 제퍼슨과 거의 같은 때 사망했는데 죽을 때 한 말 중에 하나는 “아직 제퍼슨은 살아있지” 였다는 것이다.  아담스는 제퍼슨이 독립선언서의 저자로 불리는 것에도 불만이었다.  제퍼슨은 당시 독립선언을 한 식민지 의회에 모인 사람들의 의견을 모아 정리했을 뿐이지 자기 혼자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실 거의 비슷한 내용의 연설을 아담스 자신이 의회에서 먼저 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퍼슨이 독립선언서 때문에 나중에 추앙받을지에 대해서 그 직전/후엔 잘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제퍼슨에게 독립선언서를 맡긴 사람 중 하나가 당시 의회 지도자 아담스였던 것이다. 

그의 예상대로 현대 미국인들은 제퍼슨을 워싱턴 다음가는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러시모어 산에는 워싱턴과 링컨 루즈벨트 (Theodore) 대통령과 함께 제퍼슨의 얼굴이 새겨져 있고 미국의 수도 워싱턴엔 링컨 기념관과 제퍼슨 기념관이 로마 신전처럼 만들어져 있지만 아담스의 동상을 찾기는 힘들다.  제퍼슨에게 진 것이 분해서 대통령 취임식에도 참석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 버린 아담스는 그러나 자기 아들 (John Quincy Adams1767-1848) 이 미국의 6대 대통령이 되었다는 점에서 위로를 얻었을 것이다. 

워싱턴과 제퍼슨이 남부 버지니아의 농장주 출신인데 반해 아담스는 북부의 보스턴 출신이다.  버지니아 농장주들은 사실 저택에서 노예를 부리며 귀족적인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었는데 비해 아담스는 별로 부유하지 않은 집안에서 청교도적 전통에서 검소하게 자란 사람이다.   미국이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는 생각은 사실 많이 과장된 것이다.  우선 미국 건국의 주도 세력은 남부 버지니아 지주출신들이었고 이 사람들은 청교도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미국의 1대 3 대 4 대 5 대 대통령이 모두 버지니아 출신이었던 것이다.  청교도들이 메이 플라워 호를 타고 내린 곳인 뉴 잉글랜드 (보스턴을 중심으로 미 북동부) 가 미국 최초의 유럽인 정착지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미국의 최초 정착촌은 포카 한타스로 유명한 버지니아 주 제임스 타운이다.  아마 남북전쟁에서 버지니아가 남부군 편을 들었고 북부가 승리하면서 뉴 잉글랜드가 미국의 원조 타운으로 부각된 것이 아닌가 싶다.

또 미국의 건국자들 즉 “국부” 들은 종교에 별 관심이 없었고 대부분이 이신론자 deist 즉 신이 존재해도 인간사에는 개입을 하지 않는다고 믿던 사람들이었다.  건국 공신 중 가장 청교도 전통에 가까운 사람이 존 아담스인데 그도 청교도와 거리가 있는 사람이다.  아담스의 아버지는 아들이 목사가 되기를 원했는데 기독교에 회의적이던 아담스는 변호사가 되었던 것이다.  왜 미국이 청교도들이 세운 나라라는 생각이 퍼졌는지 잘 모르겠다.  최근에 미국 TV 케이블 방송인 HBO 에서 '존 아담스' 라는 제목으로 그의 전기와 미 건국 초기의 역사를 영상화한 미니 시리즈가 방송되었는데 미국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겐 아주 유익하고 재미있는 프로그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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