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리엄 제임스  William James (1842-1910)


분트보다는 10 년 뒤에 태어났고 프로이트보다는 12년 전에 태어난 윌리암 제임스도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들 중 한사람으로 언급되고 미국 심리학의 아버지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다. 제임스는 분트와 여러면에서 대비된다. 분트는 에너지가 많고 엄청나게 부지런한 사람이었던 것에 비해 제임스는 병치례도 많이 하고 가끔씩 깊은 우울증에 빠지고 불안 장애 증상을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또 분트는 당시 미국에 비해 문화적으로나 학문적으로 훨씬 앞서 있던 독일에서 당시에 유명한 학자들로 부터 생리학을 체계적으로 공부했다. 분트는 5년 넘게 에너지 보존의 법칙으로 유명한 헬름홀츠 (Hermann von Helmholtz) 의 조교로 일하기도 했다. 반면에 제임스는 주로 독학으로 심리학과 철학을 공부했다. 제임스는 미국 대학에서 최초로  심리학 과목을 가르쳤고 그의 제자 중 한 사람은 미국 최초의 심리학 박사가 되기도 했지만 본인은 자기가 심리학을 강의하면서 듣고 배웠다고 농담을 했을 정도로 거의 독학으로 심리학을 공부한 사람이다. 

윌리엄 제임스는 뉴욕 맨해튼에서 부잣집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장소는 후에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두 번 세워질 장소에서 세 블록 떨어진 곳이다.) 제임스의 아버지가 별로 경제 활동을 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집이 경제적으로 여유로웠던 이유는 할아버지가 덕분이었다. 그의 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이름도 윌리엄 제임스이다) 는 자수성가한 부자로 유명했다. 담배 가게 점원으로 시작해서 한때 지금 뉴욕주 시라큐스 주변 지역 땅을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을 정도로 돈을 많이 모았다고 한다. 손자 윌리엄 제임스는 아버지와는 달리 수입이 있는 직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의대에 진학했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동생인 헨리 제임스도 소설가로 유명했다. 당시 미국 작가 중 가장 위대한 작가 중 하나로 평가되기도 한다. 후에 영국으로 귀화했기 때문에 꼭 미국 작가라고 하기도 어렵지만. 형 제임스의 연구 업적이 21세기 심리학 개론 교과서에서도 비중 있게 다루어 지듯이 동생 헨리의 작품들도 20세기 말까지 영화화 되기도 하였다. 윌리엄 제임스의 여동생도 작가로서 당시에 이름 알렸다고 하니 재주가 아주 많은 집안이었다.

유럽과 미국을 오가며 어린 시절을 보낸 윌리엄 제임스는 남북 전쟁이 시작될 무렵 하바드 대학교에 진학한다. 당시에 하바드 대학교는 교수 23 명에 총 학생 수 500 명 쯤 되는 작은 학교였고 입학 시험이 없고 학기 중에도 아예 필기 시험이 없던 시절이었다. 윌리엄 제임스의 아버지는 하버드 대학에 진학하려는 아들에게 쓸 데 없이 대학가서 시간 낭비 하지 말라고 말렸다고 한다. 아버지에게 대학엘 안 보내주면 입대해서 남부군과 싸우겠다고 했서 그것보다는 대학에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아버지는 입학을 허용했다. 대학을 다니다가 의대로 전과한다. 하바드 의대도 입학 시험도 중간 고사도 기말 시험도 없던 시절이었고 고등학교 졸업장도 필요 없고 등록금만 내면 받아 주었고 빠르면 1 년 만에도 의사 학위 (M.D.) 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제임스가 의대에 입학한 해가 1864년 이다).  의대생 중 반 이상이 글을 잘 쓸 줄 몰라서 유일한 시험이었던 졸업시험은 구두 시험이었다. 당시 하바드 의대가 이런 식이었던 것은 돈 때문이었고 (과정을 까다롭게 만들면 학생들이 안 오니까) 제임스가 의대에 진학한 이유 중 하나도 돈 때문이었다.  할아버지는 재벌 급 부자였지만 손자 대 와선 평생 유산으로 넉넉하게 살 만큼은 안되었던 모양이다. 

제임스는 의학 공부가 적성에 잘 맞지 않았던지 휴학을 하고 아마존 탐사에 따라 나선다. 하바드 대학의 생물학 교수 중 한 사람이 다윈의 진화론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아마존의 동 식물들을 탐사하러 가는데 자원 봉사 조수로 따라간 것이다. 탐사 결과가 다윈의 진화론이 틀렸다고 증명하지는 물론 못했고 애초에 제임스는 오히려 진화론을 믿는 편이었다. 돌아와서 복학 했다 다시 휴학하고 유럽으로 간다. 우울증과 허리 통증 등 문제로 휴양 차 간 것이다. 유럽에서 심리학과 생리학을 공부하기로 마음 먹고 보스턴으로 돌아와 입학 한 지 5년만에 의사 학위를 받는다. 졸업시험 (구두) 에서 윌리엄 제임스가 받은 질문 중 하나는 아버지 요새 어떻게 지내시냐 였다고 한다. 윌리엄 제임스의 집안은 당대 미국의 저명인사나 문인들과 교류가 많았다. 당시의 미국은 고등교육이 자리 잡기 시작하던 시기였고 미국 아이비 리그 대학원에 다니는 학생 수가 다 합쳐도  열댓 명 이었고 심각하게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려던 학생들은 독일을 포함한 유럽으로 가던 시절이었다. 당시 독일엔 천명 정도의 대학원 생이 있었고 하버드 대학은 독일의 대학을 모델로 삼아 학교를 발전 시키려 애쓰던 시절이었다.  의대를 졸업한 뒤 4년 간 진로를 고민하다가 하바드에서 생리학을 가르치는 시간 강사 자리를 얻게 되고 후에 심리학과와 철학과의 정교수까지 승진하며 은퇴할 때까지 하바드 대학에서 일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대로 분트에 비해 심리학이나 생리학에 대하여 체계적인 교육은 훨씬 덜 받았지만 윌리엄 제임스의 저술과 연구 성과들은 오히려 분트의 업적보다 쉽게 현대 심리학 개론 교과서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사람의 기억을 단기 기억과 장기 기억으로 나누어 보는 이론도 제임스가 시작한 것이고 사람이 감정을 의식적으로 느끼기 전에 몸이 먼저 반응한다는 통찰도 그의 이론이다. 그는 또 종교 심리학의 창시자이기도 하다. 실용주의자인 제임스는 종교 교리가 맞냐 틀리냐 이런 문제 보다는 종교적 경험이 인간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가 하는 문제에 대하여 연구했다 (그는 대체로 종교의 영향을 긍정적으로 보았다).  

분트는 심리학 분야에도 많은 업적을 남겼지만 철학자로서도 유명하다. 그는 심리학 교수로 재직하다가 철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신생 학문인 심리학보다는 전통이 있는 학문 분야인 철학이 더 사회적으로 인정 받았을 것이고 제임스는 소소한 실험을 하는 것 보다는 생각에 바탕을 둔 이론에 더 관심이 있어 했다고 한다. 그는 실용주의 철학의 창시자 중 하나로 여겨진다. 유명한 영국의 철학자 화이트 헤드는 윌리엄 제임스를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라이프니츠 와 비교되는 천재라고 부를 정도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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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트 (Wilhelm Wundt 1832–1920)


Wundt 가 만든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 앉아 있는 사람이 본트이다.


현대 심리학의 창시자라는 영예로운 타이틀은 독일의 빌헬름 분트에게 붙여져 있다.  독립된 학문 분야로서 현대 심리학이 시작한 해를 1879 년으로 본다. 분트가 독일의 라이프찌히 대학에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설립한 해이기 때문이다. 1879 년은 한국에선 대한 제국이 선포되어 고종이 황제 제위에 오른 해이고 아인슈타인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심리학의 또 하나의 지류라고 볼 수 있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시작된 해를 히스테리아에 대한 연구 (Studies on Hysteria) 라는 책이 출판된1895 년으로 보니까 그 보다 16년 전이다. 사회학의 시작을 프랑스 보르도 대학교에 사회학과가 만들어진 1895년으로 본다니까 사회학보다는 역사가 오래된 학문 분야이다.  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 가장 많은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독일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과학의 중심지였고 과학적 심리학이 독일서 시작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당시 독일은 학문의 자유를 많이 존중해 주어서 대학에서 교수가 무슨 연구를 하든 간섭이 없었고 순수 힉문을 존중했으며 기존 학문의 틀을 넘어서는 연구가 많이 진행되고 있었다. 분트는 이런 환경에서 새로운 학문분야 심리학을 창설했던 것이다. 


분트는 최초의 심리학자이기도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부지런한 심리학자이기도 하다.  요새 개념으로 치면 일 중독자 수준이다. 그러나 분트가 어릴 때는 공부도 못하고 주의가 산만하다고 아버지와 학교 선생님들로부터 야단을 많이 맞던 평범한 학생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의대를 다니다가 (당시엔 공부를 잘 못해도 의대를 갈 수 있었던 모양이다) 갑자기 철이 들어 공부를 열심히 하기 시작해서88세로 죽기 직전까지 엄청난 양의 논문과 책을 썼다. 분트가 쓴 책과 논문은 500 편이 넘고 총 53,000 페이지가 넘는다고 한다. 20세 이후 매년 7 – 8  권의 책이나 논문을 쓴 것이다. 죽기 사흘 전까지도 논문을 썼다고 한다.  게다가 분트가 직접 지도해서 배출한 박사가 186명이나 된다 (이 정도는 전무후무한 기록일 것 같아서 혹시 기네스 북에 올라 있나 확인해 보니 없다). 학기 초 대학원 생들이 분트 앞에서 도열해 있으면  각 학생들이 수행해야 할 연구 과제를 지시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많은 독일 교수들이 그러했듯이 분트는 상당히 권위주의적인 교수였던 모양이다. 


분트의 그 많은 논문들과 책들 중에, 그러나, 현대 심리학 개론 책에서 언급된 것을 찾아 보기 어렵다. 다른 1 세대 심리학자들인 윌리엄 제임스나 프로이트의 연구를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것과 대비된다.  분트의 업적은 그가 발견해낸 개념이나 이론보다는 심리학을 철학에서 떼어내어 독립된 과학 분야로 만들고 수많은 제자들을 길러내어 그 제자들이 현대 심리학을 발전 시켰다는 점에서 찾아야 할지 모른다 (근래에 그의 연구 업적에 대하여 재평가 하려는 움직임이 있기는 하다). 그에게 심리학을 배운 학생들이 미국 일본 인도 등 세계 각지 대학에서 심리학과를 창설했다. 그는 특히 미국 심리학계에 큰 영향을 미쳤는데 미국 심리학회 (American Psychological Association) 초기 회장들이 대부분 (1, 4, 5, 6, 7 대 등) 분트에게서 박사 학위를 받았거나 그의 연구실에서 수학한 바 있는 심리학자 들이다.  특히 초대 미국 심리학회 회장인 홀 (G. Stanley Hall) 은 분트가 라이프찌히 대학에서 최초의 심리학 실험실을 만들 때 분트를 도왔던 사람이다.  분트는 또 심리학자 (psychologist) 라는 명칭을 최초로 사용했고 최초로 심리학 교과서를 쓰기도 했다.  분트에게 현대 과학적 심리학의 창시자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여진 이유는 심리학 실험실이라는 간판을 라이프찌히 대학의 한 창고에 달았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 분트에게 심리학의 창시자라는 말은 좀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좀 좁게 실험 심리학의 창시자 또는 과학적 (학문적) 심리학의 창시자 라고 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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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카르트 (1596 – 1650)


심리학 이라는 자체는 16 세기에 출판된 독일의 철학 서적에서 처음 쓰기 시작했다고 한다 (독어로는 Psychologie). 어원적으로 Psyche (영혼, 마음) logy (학문) 합쳐진 말이다. 영혼에 대한 학문이라는 뜻이다.  Psyche 라는 단어는 그리스-로마 신화에 나오는 아름다운 공주의 이름인 싸이키 (Psyche) 부터 유래된 말이다그녀는 너무 예뻐서 미의 여신인 비너스 (Venus) 질투 정도였다. 질투에 화가 비너스는 자기의 아들인 사랑의 큐피드 (Cupid) 보내 싸이키를 없애 버리려 하였는데 막상 그녀를 큐피드는 미모에 반해 사랑에 빠지고 만다큐피드와 싸이키의 사랑은 비너스의 질투 말고도 장애가 많았는데 가장 문제는 싸이키가 유한한 생명을 가진 인간이라는 점이었다여러 가지 역경을 극복한 끝에 결국 싸이키는 영생 (immortality) 얻게 되고 큐피드와 정식으로 결혼한다. ( 딸이 쾌락의 여신인 Hedone 이고 쾌락주의 (Hedonism) 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 말이다.) 그래서 싸이키는 몸은 죽어 없어져도 남아 있는 영혼을 의미하는 말이 되었고 마음 (영혼) 연구하는 학문은 Psychology (심리학) 라고 불리게 것이다.

 

엄마 말 안듣고 싸이키와 사랑에 빠진 큐피드


그러고 보면 심리학 Psychology 이라는 말은 어원적으로는 마음과 육신이 분리된다는 이원론 (Dualism) 내포하고 있다. 마음이 (물질적 세계) 어떻게 다른지, 둘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라면 어떻게 상호작용을 하는 것인지 그리고 정말 분리 있는 것인지 등등 심신 이원론에 관련된 질문들은 심리학의 중요한 문제들이다. 사람들은 대다수가 심신이원론자이고 대부분의 종교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고 있다. 육체가 죽은 후에 영혼이 천당을 간다든지 환생한다는 생각은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다는 이원론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이 몸과 마음에 관해 이원론적인 생각을 가지게 기원이 꿈이라는 설도 있다. 시람들이 꿈을 꾸고 후에 몸은 침대 (동굴?) 내내 있었는데 나의 마음은 몸을 떠나 이웃 부족과 전쟁을 하거나 산속에서 사냥을 하고 또는 바다 위에서 물고기를 낚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심신 이원론으로 제일 유명한 사람이 현대 서양철학의 아버지라고 하는 데카르트이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말로 유명한 데카르트는1596 프랑스에서 태어났다. 한국에선 임진 왜란으로 난리가 났던 시기이고 영국에선 세익스피어가 이탈리아에선 갈릴레이가 한창 활동 중인 때이다. 태어난 얼마 안돼 모친이 사망하고 어릴 때부터 허약해서 평생 오전 시간은 침대에 누워 지냈다고 한다. 누워서 게으름만 부린 것은 아니고 철학적 학문적 문제에 대한 사색을 했다는 것이다. 아버지로 부터 받은 유산 덕에 그런 생활이 가능했다. 데카르트는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지만 법률가로 일하지는 않았고 철학 수학 음악 천문학 신학 의학 다양한 분야에 대하여 읽고 사색하고 책을 쓰며 살았다. 사람들이 찾아와 사색을 방해하는 것이 싫어서 프랑스를 떠나 네덜란드로 이사갔다고 한다. 자신의 사상 때문에 갈릴레오 처럼 핍박 받을까봐 카톨릭 영역이었던 프랑스를 떠나 신교 국가인 네덜란드로 갔다는 설도 있다. 그곳에서 20 후반에서 50 초반까지 책을 쓰면서 살던 스웨덴 여왕의 개인교사로 초청받아 그리로 갔다. 그런데 여왕이 새벽에 수업 받기를 고집하는 바람에 오전은 침대에서 지내던 데카르트가 무리해서 일찍 일어나 추위에 떨며 여왕의 거처를 왕복하다 폐렴에 걸려 53 나이에 죽었다고 한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알듯 말듯한 말을 하게 배경은 당시 전통적인 지식 체계의 붕괴와 관련이 있다.  당시 전통적으로 절대적 권위를 누리던 구교가 신교의 도전을받아 전쟁을 벌이게되고 (30 전쟁), 2천년간 서양을 지배해 오던 아리스토텔레스 가라사대 지식 체제가 흔들리던 시대였다. 데카르트는 모든 지식을 의심해 보자 라는 사유를 시작하였다가 의심을 하는 자신의 존재는 의심할 수는 없다는 논리적 결론을 내린다. 의심하는 주체를 의심하면 게임이 시작이 안되니까 그런 말을 하였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런 회의주적 태도는 당시의 종교적 세계관을 대체하는 과학적 세계관의 기초가 된다.  

심신 이원론은 현대 심리학에서 지지를 받지 못하지만 데카르트는 당시 영혼과 몸의 상호 작용의 과학적 연구를 제시하여 영혼은 절대적으로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종교계의 미움을 샀다고 한다. 특히 데카르트는 감각 지각 기억등은 영혼이아닌 () 영역으로 보고 기계적인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았는데 이런 접근이 현대 심리학이 시작하게 되는 바탕이 되었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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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eud - 3

심리학자들 2018.06.16 13:49


 

그러면 프로이트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프로이트가 사람들이 인간 심리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것은 부인할 없는 사실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맞았건 틀렸건 사람들은 프로이트가 만든 틀로 스스로의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심리학 분야에서 20세기가 프로이트의 시대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인간의 심리가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시대에 마음을 내재적 충동 (Id) 사회화 (Superego) 그리고 이성적 계산 (Ego) 상호작용으로 설명하려 했던 접근은 획기적이고 과학적인 시도였다고 본다.  현대 심리학자들은 사람의 마음이 하나가 아니라는 점에서는 동의하지만 이드 이고 슈퍼이고 삼등분에 대해서는 거의 동의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수퍼이고 도덕성이 부모나 주변의 가르침에 결정된다는 부분에도 이견이 많다. 도덕성 사회성도 타고난다는 것이다 (진화의 과정을 통해 형성 되어 있기 때문에). 프로이트의 성욕의 중요성에 대한 주장은 진화론으로 쉽게 포용이 된다.

 

프로이트가 활동하던 시절 사람들 특히 여자들에게 사회가 요구하는 모습과 본능적 충동 사이의 괴리가 컸다. -상류사회 (또는 상류사회를 지향하는) 여성들에게 요구되는 이상적인 여성상은 성모 마리아처럼 순결하고 도덕적인 여자로서 성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는 점을 드러내 놓고 인정하기 어려운 시절이었다. (프로이트의 환자들은 거의 상류 여자들이었다) 일부는 실제로 자신이 성적 욕구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의식적으로 부인했을 것이다. 자신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 있는데 원하는지 모른다면 그래서 충족 시키지 못하고 있다면 당시 프로이트의 환자들 처럼 히스테리 정신 질환에 걸렸을 것이다. 프로이트의 치료 방법은 무의식 속에 숨어 있는 자신의 동기를 발견하여 그것은 충족 시키려 노력하라는 것이었다.  여기 까지는 프로이트의 심리학 대체로 말이 되는 부분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기본적으로 일리가 있었던 통찰을 바탕으로 직관과 상상력을 지나치게 발휘한 하다. 그런 의미에서 프로이트나 융같은 심리학자들은 인문학적 심리학자들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프로이트의 성욕에 바탕을 성격 발달이론 (구강기 항문기…) 같은 이론들은 심리학 교과서에서 빼야 한다. (심리학사 책에는 넣고).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 심리 치료 정말 효과가 있는가에 대한 논란도 아직 지속되고 있다 (최소한 행동 치료처럼 훨씬 간단한 치료 방법이 효과가 있다는 연구 결과가 많다). 프로이트 정신 분석 하면서 억눌린 무의식 속에 숨겨진 기억을 찾는다고 하다가 없는 부모를 성추행범으로 경우도 많았고 그에 관련하여 자식이 부모를 고소하고 부모는 정신과 의사를 고소하는 사례가 90년 대 미국의 유행병 같았던 시절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프로이트는 뛰어난 통찰력으로 19 세기 20 세기 심리학 발전에 많은 공헌을 사람이다. 그러나 21 세기에 프로이트의 정신분석 이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 들이고 응용하는 것은 권장할 바가 못된다. (융이니 라캉이니 이런 사람들의 이론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유명한 프로이트의 소파가 있는 그의 서재. 영국 프로이트 집에서 찍은 사진 들인데 안타깝게도 흔들렸다. 



프로이트 일단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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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이트는 누구인가 2

 

프로이트는 처음부터 아주 " 나가던" 의사가 아니었다. 프로이트는 자기와 같이 의사가 동기들 중에 가장 늦게 "교수 (Professor)" 라는 타이틀을 받았다고 한다. 의사에게 교수라는 명칭이 당시 오스트리아 에서 무슨 대학에 소속되는 직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정부에서 주는 자격증 같은 것인 듯싶다. 그나마 청탁도 넣고 해서 얻었다고 한다. 프로이트의 치료 방법 정신분석 주류 사회가 인정하지 않으려 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병아리 의사 시절 코카인의 효과를 경험하고 그것이 만병통치약으로 생각해서 그에 대한 논문을 발표해 유명해지려고 했다고 한다. 당시만 해고 중독성 같은 코카인의 후유증에 대하여 몰랐던 것이다. 프로이트가 편지에 의하면 그는 남들에게 인정받고 유명해지고 싶은 동기가 강했다고 한다. 모르핀 중독으로 고생하는 친구에게 코카인을 처방해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기도 하고 자기 약혼녀에게도 권했다고 한다. 코카콜라도 처음엔 코카인을 원료로 만들었다 하니 프로이트만 무식했다고 하기 어렵다.

 

처음부터 프로이트는 관련 학계에서는 인정해 주지 않았고 대신 일반인들과 문화/예술계에 널리 알려지게 된다. 프로이트를 학계에서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인정해 곳은 대서양 건너 미국의 클라크 대학교 (Clark University) 이었다. 그곳에 가서 강연도 하고 명예박사 학위도 받고 기쁜 마음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당시에 권위 있는 학자들이나 주류 의학계에서 인정하거나 말거나 프로이트의 명성은 세계로 퍼져나갔다. 당시에 유럽의 카페에 앉아있으면 프로이트에 대한 대화가 들려 왔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그를 추종하는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프로이트 집에 모여 그의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토론하는 모임도 생기고 모임을 바탕으로 국제 정신분석학회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그러면서 처음에 프로이트를 추종하던 사람들 중에 프로이트의 권위에 도전하고 자기 나름대로의 정신 치료 이론을 만드는 사람도 생긴다. Alfred Adler (1870 1937) 프로이트의 집에 모여 정신분석학을 배우고 토론하던 의사 하나였는데 결국 잠재적 성욕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프로이트의 이론에 반발하고 나가 독자적인 이론을 만들어 나름대로 이름을 날린다. 특히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인 (Carl Jung) 반란은 프로이트에게 타격을 주게 된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학이 비엔나에 사는 유대인 의사들을 넘어서서 세계로 퍼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유대인이며 스위스에서 활동하는 정신과 의사인 융에게 자기가 창립한 정신분석학회의 회장을 맞기면서 "총애" 했다. 일종의 사도 바울의 역할을 하기를 기대한 것인데 융도 결국 프로이트의 동기에 중점을 "교리" 반발하고 독자적인 정신분석학을 주창하게 된다. 어떤 신학자들은 사도 바울도 예수의 본래 의도와는 다른 종교를 만들었다고 하는데 그런 식이 것이다.

 

그래도 프로이트와 그의 정신분석학 "복음" 널리 퍼져서 결국 주류 사회도 프로이트를 인정하고 받아들인다. 미국과 유럽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창설되고 권위 있는 괴테 상을 받기도 하고 영국 왕립과학원 회원으로 추대되었으며 그의 고향 동네는 프로이트의 생일에 맞춰 축제를 벌이기도 한다. 프로이트가 아쉬워 것이 노벨상을 받은 것이다. 프로이트의 측근들은 그가 노벨상을 받게 하려고 여러 유명 인사의 추천장을 받았는데 아인슈타인은 끝내 추천장 쓰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은 프로이트에 대하여 인간적으로 호의적이었지만 정신분석학은 비과학적이라고 보았다. 정신분석학 이론이 약간 "사기성" 있다고 평가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 외에도 비트겐슈타인이라든가 포퍼같은 당대의 철학자들도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에 비판적이었다.

 

프로이트의 명성은 그와 그의 가족의 목숨을 나치로부터 구한다. 나치가 오스트리아 정권을 잡게 되자 문자 그대로 길거리에서 몰매를 맞아 죽은 유대인들도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를 나치 치하에서 구해내려고 여러 나라 인사들이 나서는데 중에 미국의 대통령 루즈벨트의 이름도 끼여 있다. 프로이트가 82 세가 되던 해에 프로이트는 가족과 함께 간신히 영국으로 도피한다.

 

런던으로 피신해서1 프로이트는 사망한다. 프로이트는 좋게 말하면 애연가였고 나쁘게 말하면 시가 중독자였다. 하루에 시가를 스무 개씩 피웠다고 한다. 시가하나가 담배 갑과 마찬가지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는데 (담배12 개피에서 70개비까지 여러 가지 주장이 있긴 한데 니코틴 함량으로 12 개비 정도가 맞는 같다) 말대로라면 하루에 담배 2보루 정도씩 셈이다. 시가라는 일반 담배에 비해 너무 독해서 경험상으로는 들여 마시지 않고 그냥 뿜어내는 "뻐끔" 담배 식으로 많이 핀다. 프로이트도 그랬을까? 프로이트는 폐암엔 걸린 것이 아니라 구강암에 걸려서 고생을 많이 하는데 오랜 기간에 걸쳐 수술도 많이 하고 고통에 시달렸다. 그랬는데도 거의 죽을 때까지 시가를 끊지 못했다고 한다. 따지고 보면 당시에 83세까지 것을 보면 시가 때문에 일찍 죽었다고 하기도 어렵지만 죽기 1 전까지 저술을 하고 환자를 보다가 마지막 수술을 받은 기력이 쇠해 결국 생을 마감하다.

 

프로이트는 사람들이 담배 피는 것을 정식분석학 적으로 자위행위의 대체 행위로 분석했다. 그런데 아무리 정신 분석해 봤자 담배 끊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구강암으로 고통을 받던 프로이트는 담당 의사에게 자기가 희망이 없을 때가 되면 억지로 생명을 연장시키려 하지 말고 편안하게 죽을 있도록 부탁해서 약속을 받아 내었고 프로이트의 의사는 약속을 지켜서 딸과 상의한 모르핀을 차례에 걸쳐 주사하여 안락사를 시켰다. 프로이트는 존엄사의 선구자이기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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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썼던 글들을 보충하고 새로 쓴 (쓸) 글들을 모아 "심리학자들" 이라는 주제로 연재를 시작합니다.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프로이트는 최초의 심리학자도 아니고 심리학의 창시자도 아니다 (그는 정신분석학 Psychoanalysis 창시자 이다). 그래도 일반 사람들에게 프로이트는 아직까지 가장 유명한 심리학자이다 (안타깝게도). 나는 소시적에 프로이트가 무슨 공자나 소크라테스 되는 사람인 알았다.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는 천재부터 심리 소설가 (그의 이론이 허구라는 의미로) 까지 극단적으로 갈린다. 생각에 그는 무의식이 인간의 마음과 행동의 아주 중요한 요인이라는 틀은 제대로 잡았는데 세부적으로 들어가서는 거의 모든 부분에서 틀렸다.지금도 외디푸스 콤플렉스 라든지 구강기 라든지 항문기 남근기 같은 개념에 바탕을 근거 없는 (황당하기까지 ) 성격 형성이론을 진지하게 받아 들이는 사람들이 많다.

 

과학적 심리학의 전통에서 보면 프로이트의 이론은 맞고 틀리고를 떠나 아예 기본적으로 과학적 이론으로서 자격이 없다고 보는 것이 21 세기 심리학자들의 다수 의견이다. 과학적 이론이란 무엇보다도 실험적 또는 경험적 자료를 가지고 이론이 맞고 틀리고를 판단할 있어야 하는데 프로이트의 이론의 상당 부분은 모호하고 애매해서 그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에게 뭔가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고 사람의 행동을 통제 예측할 있을 같은 느낌을 주는 경향이 있다. 이런 점은 라캉같은 현대 정신분석학자들에게도 적용되는 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로이트의 이론이 그렇게 많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고 문화 예술에 많은 영향을 끼쳤는지도 재미있는 심리 현상 하나이다. (우리나라에서 혈액형 성격이론이 인기있는 이유와 관련이 있다). 그렇다고 프로이트가 완전히 엉터리거나 사기꾼이라고 수는 없다. 앞서 언급했듯이 무엇보다 심리학에서 무의식의 중요성을 상기시켜 공로가 있다. (그 무의식의 내용에 대해서는 프로이트의 생각과 현대 심리학의 의견이 좀 다르다)  100 학자를 21 세기 기준으로 비판하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 사람 마음이 복잡하듯이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도 복잡하다. 프로이트는 누구인가? 우선의 그의 삶을 살펴본다.

 

London 근교에 있는 프로이트가 말년에 살았던 집


프로이트(1856 - 1939)

 

프로이트는 1856 년에 오스트리아 (현재 체코 지역) 에서 태어났다. 나이로 따지면 현대 과학적 심리학의 창시자라고 불리는 분트 (Wundt) 조카뻘이고 (24 아래) 아인슈타인의 삼촌뻘 (23 ) 된다. 개화시대 정치가였고 서유견문을 쓰기도한 유길준과 동갑내기이다. 서유견문에 미국과 유럽 여행기가 들어있다는데 유길준이 프로이트가 활동했던 비엔나도 갔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찾았다. 프로이트는 그의 아버지가 번째 결혼해서 낳은 아들이다. 그래서 프로이트의 어머니는 아버지에 비해 아주 젊었다. 스무 차이라고 한다. 그래서 어린 프로이트는 늙은 아버지와 젊은 어머니가 어울리지 않고 차라리 전처의 아들 (프로이트의 이복 ) 어머니와 어울린다는 생각을 어릴 적이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어렸을 어머니의 나신을 것에 대한 충격을 성인이 되어서 특별히 기억하며 자기 자신의 심리를 분석했다고 한다. 이런 경험이 그가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라는 개념과 관계가 있을 것이다. 또래 남자들은 어렸을 어머니 잡고 여탕에 따라가서 어머니 아니라 동네 아줌마 아가씨 할머니 나신을 보고 사람들이 많을 터인데 프로이트가 알았다면 할말이 많았을 것이다.

 

경제적으로 프로이트의 집안은 넉넉하지 못했다. 아주 빈곤층은 아니었지만 가난한 중산층이라고 있다. 프로이트는 성인이 되어서도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의대를 졸업하고도 돈이 없어서 약혼녀와 결혼하지 못하고 오래 떨어져 살아야 했고 나중에 개업의 시절에도 항상 환자를 많이 받아 돈을 벌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꼈다고 한다. 의사/정신 분석가로서 자리를 잡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겼다가 전쟁 (1 대전) 때문에 고생했다. 전쟁 물자가 부족해서 고생하고 전후에는 패전국 오스트리아의 국민으로서 식량과 땔감이 부족해 추위와 배고픔에 시달렸다. 그래서 외국에 사는 친지들이 보내주는 음식에 의존하기도 했다. 패전국 오스트리아는 영토의 상당 부분이 분할되어 프로이트가 태어난 곳도 다른 나라 (체코슬로바키아) 버렸다. 프로이트는 어릴 적부터 똘똘하고 공부를 잘해서 부모의 사랑과 기대를 많이 받고 자랐다. 9 대식구가 침대방 있는 집에 살았는데 프로이트에게만 독방을 주었다고 한다. 프로이트가 공부하는데 시끄럽다고 해서 여동생의 피아노를 처분해 버려 여동생이 두고두고 서운해 했다고 한다.

 

프로이트는 비엔나 의과 대학을 다녔는데 순수 과학이나 철학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의사가 것은 경제적 이유 때문이라고 한다. 프로이트는 자기가 만든 정신분석학이 의학의 일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프로이트의 막내 Anna Freud 유명한 정신분석가가 되어 환자들을 받았는데 그녀는 의대를 나온 것이 아니고 교사를 하다가 아버지에게 직접 정신분석학을 배워 그리 것이다. 유명한 살로메 (Lou Andreas-Salomé) 프로이트에게 직접 가르침을 받은 -의사 정신분석가로 활동하였다. 살로메는 유명한 남자들과 연애를 많이 했는데 프로이트와도 관계가 있었다. 고등학교 땐가 살로메의 전기를 읽었던 기억이 있는데 내용은 기억이 나고 사진만 기억이 난다. 공부도 해야하고 바빠 죽겠는데 살로메 책을 사서 읽었는지 모르겠는데 유럽/서양 문화에 대한 동경심 같은 것도 작용했을 것이다. 이야기가 데로 샜는데 이렇게 프로이트가 설정한 의학과 정신분석학의 관계는 나중에 문제가 된다. 의사 출신 정신 분석가들은 아무나 정신분석 한다고 나서서 진료실을 열고 환자를 받는 것이 불만이어서 의사들만 정신 분석가가 있게 하려고 시도하다가 정신분석학의 원조인 프로이트와 충돌하기도 하기도 하고 법정 소송이 열리기도 한다. 프로이트는 환자의 문제가 신체 질환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면 전통적 의학은 소용이 없다고 생각했다. 특히 미국에서 의사들의 텃새가 가장 심했는데 요새는 의사나 심리학 박사 또는 사회사업 치료사들을 정신분석가 훈련과정에 받아준다. 그러나 전공은 받아주지 않는다. 프로이트의 고장 유럽에서는 개방적이라고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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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Park 2


센트럴 파크는 마차 타고 돌아다니는 방법도 있고 자전거 타고 돌아 다니는 방법도 있는데 제일 좋은 방법은 걷는 것이다. 마차는 비싸고 말똥 냄새도 나고 가는 길이 제한 되어 있다. 자전거도 도로가 제한 되어 있다 (재미있는 구석을 들여다 보는데 오히려 짐이 된다) . 그렇지만 시간이 제한된 관광객의 입장에서 센트럴파크를 걸어서 한바퀴 다 돌만큼 볼 것이 많지는 않으니 자전거를 타고 한바퀴 돌아 보는 것도 그리 나쁜 생각은 아니다. 파크 남쪽 6 ave 에 Citi Bike 빌려 주는 데가 있는데 30분 이상 타면 비싸진다고 한다. 그 주변에 자전거 빌려주겠다고 호객행위를 하는 상인들이 즐비한데 빌릴까 하다가 그냥 가면 더 깎아 준다고 한다. 실제로 빌려 본 적은 없다. 경치 좋은 곳 몇 군데를 꼽자면 The Loeb Boathouse (너무 덥지 않을 때 여기서 보트를 빌려 타는 것도 괜찮다), Belverdere Castle (2018 5월 12일엔 공사 중이었다), Bethesda Fountain 등이 있다. 


Bethesda Fountain (아래) 은 Central park 의 중심이라고 부르는데 지도를 보면 센트럴파크 남반부의 중심에 있다. Bethesda 라는 이름은 성경에 나오는 고대 예루살렘의 로마식 목욕탕/수영장 Bethesda Pool 에서 따온 것이다. 천사가 이곳의 물을 휘저을 때 들어가는 첫번째 사람의 병이 낫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주변에 앉아 기다렸다는 곳이다. 아래 사진의 천사가 바로 그 천사를 나타낸다. 그렇다고 이 분수에서 병을 낫게 해달라고 비는 사람이 있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대신 이 분수의 북쪽에 (센트럴파크 중간 쯤에) 뉴욕시 상수원으로 쓰이던 저수지가 있는데 그 덕에 뉴욕 시민들이 전염병에 걸리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고 한다. 이 분수의 물은 거기서 끌어다 쓰는 것이라고 하니 전혀 연관이 없다고 하기는 어렵겠다.



아래 사진은 그 분수 바로 옆 Bethesda Terrace 이다. 사진을 찍고 있는 신부가 왼쪽에는 길거리 성악가가 노래를 하고 있다. 

파크 중간 쯤 (79 street) 에 서쪽으로는 American Museum of Natural History 가 있고 동쪽으로는 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가 있다. 메트로 뮤지엄은 세계 10 대 박물관을 꼽으라면 꼭 들어가는 데  (National Geographic Forbes 등 유명 잡지들에 따르면) 방문객 수로는 세계 세번째 박물관이란다 (1위는 파리의 Louvre 이고 2위는 북경의 중국 국립 박물관이라 한다. 말 나온 김에 4위는 바티칸 5위는 대영박물관). 메트로 뮤지엄은 최근까지 사실상 “공짜” 였다.  (내고 싶은 액수를 내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2018년 3월 이후) 성인인 경우 25불씩 내야한다. 예외가 있긴하다.  뉴욕주 면허증이 있거나 뉴욕 뉴저지 커네티컷 학생증이 있으면 예전처럼 “pay-as-you-wish” 이다. 


센트럴파크는 1853년에 만들기 시작했는데 만든 이유 중 하나가 뉴욕에도 런던의 Hyde Park 같은 공원을 만들어 주변 부동산 가격을 올리려는 것이었다. 센트럴파크의 크기(3.4km2) 는 남산 (2.9km2)보다 조금 크고 서울 숲의 세배정도 된다. 재미있는 것은 이 땅을 매입하기 위해 쓴 돈이 알래스카를 구입한 가격과 비슷하다는 것이다. 센트럴파크를 짓기 시작한지 10년 쯤 되었을 때 미국은 러시아 제국으로부터 알래스카를 720만불에 샀는데 (1867년) 센트럴파크 부지 가격이 740만불이었다는 것이다. 센트럴파크를 짓기 전 그 땅에는 흑인들을 포함한 빈민들이 살고 있었고 가축을 기르기도 했었다 고 한다. 센트럴파크의 남쪽은 여러가지 인공 시설 들이 많아 더 화려하고  북쪽은 나무가 많고 더 자연스럽다.

The Loeb Boathouse 에서 보트를 빌려 타다 찍은 사진. 내 컴퓨터 배경 화면이기도 하다.


Belverdere Castle. 성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작다. 전망대이다. 아래 사진은 거기서 내려다 본 풍경 둘





맨해튼 일단 끝. (추후 보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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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entral Park - 1

 

맨해튼에서 TV 가장 많이 나오는 곳이 Times Square 라면 영화에 제일 많이 나오는 곳은 Central Park 이다. 59 street 에서 110 street 사이 그리고 5th Ave 에서 8th Ave (Central Park West 라고도 불린다) 사이의 직사각형 모양으로 그대로 맨해튼의 중앙 공원이다. 남쪽부터 살펴보면 Central Park 남서쪽 모서리엔 Columbus Circle 있고 남동쪽 모서리엔 Plaza hotel 있다.  

 

컬럼버스 써클 중심엔 당연히 컬럼버스 동상이 있다. 1892 년에 컬럼버스의 미대륙 상륙 400 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탈리아 출신 미국인들이 주도하여 세운 것이다. 최근에 컬럼버스가 재평가 되면서 (원주민들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다) 없애자는 여론도 있다. ( 지역 컬럼버스 동상의 부위에 빨간 페인트를 칠하기도 하도 받침대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를 하는 일도 있어서 요새는 동상에 대한 경비가 심해졌다고 한다.) 유럽에서도 느꼈던 것이지만 동상을 높은 위에 올려 놓았는지 의아하다. 열심히 만들어 놓고 수도 없게. 멀리서 보이라고 그런건가.

 

뉴욕서 제일 유명한 호텔인 Plaza Hotel Home Alone (2), Sleepless in Seattle, The Great Gatsby 여러 영화에 등장하기도 했다. 한때 Trump  소유한 적이 있었는데 다행히도 너무 비싸게 사서 파산하여 되팔았다. 유학생 시절이던 80 년대 후반에 플라자 호텔을 구경할 커피숍에 적이 있는데 바로 앞에Arnold Schwarzenegger 그의 부인이었던Maria Shriver 커피숍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있었다.  누구는 브라운에 가고 누구는 하바드에 가고 그런 얘기를 하고 있었는데 아마도 케네디 가문 아이들 대학 입학 이야기를 하는 같았다. 조금 있다가 호텔 매니저가 나타나 두사람을 커피숍 안으로 데리고 가버렸는데 아무도 사인을 받거나 사진을 찍자 거나 하는 사람은 없어서 속으로 뉴요커들은 자존심이 강한가보다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때만 해도 유명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플라자 호텔 맞은편 (센트럴 파크의 모서리) 에는 남북 전쟁 영웅인 Sherman 장군의 금빛 동상이 승리의 여신과 함께 있다. 남부군에게 무자비했던 장군으로 유명한데 파죽지세로 남부의 도시들을 점령하여 북부가 승리하는데 공을 세웠다. 2 세계대전 가장 많이 쓰였던 미제 탱크를 그의 이름을 붙여 셔먼 탱크라고 부른다. 남북 전쟁이나 셔먼 장군이나 왠지 황금빛과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셔먼 동상에서 블록 떨어진 (6th Ave 에서 Central park 들어가는 입구) Jose de San Martin 장군의 기마상이 있다. 사람은 아르헨티나의 조지 워싱턴이라고 불리는 사람으로서 스페인으로 부터의 독립 전쟁을 이끈 장군이다. 미국은 아르헨티나에 조지 워싱턴 동상을 보내고 아르헨티나는 미국에 동상을 보냈다고 한다. 동상 바로 뒤엔 스페인 제국에 대항한 다른 남미의 영웅 Simon Bolivar 동상이 있다. 볼리비아는 사람의 이름 만든 국명을 만들었다고 한다. 동상들을 지나 파크 안으로 들어가다 보면 또다른 호세의 동상이 나온다. 쿠바 독립 (스페인으로 부터) 영웅 Jose Julian Marti 기마상이다. 동상들이 있는 곳은  6th Ave Central Park 만나는 지점인데 6th Ave Avenue of Americas 라고도 부르는 이유는  북미와 중남미의 연대를 기리자는 의미라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후반부터 미국과 중남미와 관계는  아주 좋다고 하기 어렵다. 중남미 사람들에게 이제 미국은 자신들을 억압하던 스페인 제국과 비슷한 이미지로 느껴지는 지도 모른다


센트럴 파크가 시작하는 남쪽 풍경을 종합해 보자면 남미에 스페인 제국의 식민지를 시작한 Columbus 동상을 서쪽에 세우고 그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의 동상 셋을 동쪽에 세운 셈이다.  Central Park 남동쪽에 모서리에 동상이 하나 있는데 이것도 중남미 독립과 연관되어 있다. 19세기 쿠바독립 전쟁 당시  미국 군함이 쿠바 해안에서 폭발하여 배에 타고 있는 260 명이 사망한 것을 추모하기 위한 조형물이다. (USS Maine Monument) 수백명의 해군이 사망한 것을 추모하는 형상물이 엉뚱하게도 세마리의 말 (해군이기 때문에 해마를 상징) 을 타고 있는 여신상 같아 보인다. 이 동상은 미국을 상징하는 여성 캐릭터인 콜럼비아를 의미한다고 한다. 미국의 수도가 District of Columbia 인 것도 영화사 이름이나 대학의 컬럼비아인 이유도 여기서 유래한다. 그런데 요샌 미국을 상징하는 남자 캐릭터인 Uncle Sam 에 밀려서 사람들이 잘 모른다고 한다. 



한편 USS Maine 함정이 침몰한 원인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확실히 밝혀 지지 않았다. 스페인이 그랬다는 설 때문에 미국과 스페인의 전면전의 계기가 되었는데 사실은 화약고의 화재 때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고 한다. 전쟁의 명분을 얻기 위해 일부러 그랬다는 음모론도 있다. 어쨌든 이 전쟁에서 승리한 미국은 필리핀과 Puerto Rico 를 차지하면서 강대국으로 인정을 받게되고 스페인은 남미 대륙에서 완전히 물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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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s Square

 

뉴욕서 가장 TV 자주 나오는 곳이 타임스퀘어이다. 서울서 보신각 타종 하듯이 해가 바뀔 마다 Ball-drop 행사를 하는 장소이고 수많은 광고 브로드웨이 극장 간판들이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면서 뉴욕에서 가장 많은 관광객들이 몰리는 곳이다타임스퀘어는 브로드웨이와 7th Ave 자로 만나는 지점 (45 street) 중심으로 42 street 과 47 street 사이의 8 지역 지칭한다. (삼각형 두개가 꼭지점에서 만나는 8자형이다. 나비 넥타이 모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광장의 남쪽 끝부분에 있는 건물 (One Times Square) New York Times 신문사 사옥이었기 때문에  Times Square 라고 불린다. 근데 뉴욕타임스 신문사는 건물에서 이사를 나갔고 건물은 주로 광고판을 붙이는 사용한다. 아래층을 뻬고는 거의 비어 있다고 한다.

맥주 사진이 보이는 건물이 Ball Drop 하는 Times Square 남쪽 끝 건물 (One Times Square). 

다른 시기에 찍은 같은 건물 사진


타임스퀘어의 북부 반쪽을 Duffy Square (또는 Father Duffy Square) 라고 부르기도 한다. 카톨릭 신부였던 Duffy 는 1차 대전 때 군목으로 참전하여 공을 많이 세워서 신부로서 가장 많은 훈장을 받았다고 한다. 전쟁터에서 부상자를 구해내는 일 뿐 아니라 실제 전투에서도 공을 많이 세우고 뛰어난 리더쉽을 발휘하여 연대장으로 임명될 뻔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Duffy 신부의 동상 뒤에는 브로드웨이 쇼 티켓을 싸게 파는 TKTS 건물이 있는데 이 건물의 지붕은 계단식 관중석처럼 되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이 올라가 타임스퀘어의 전경을 내려다 보는 명소가 되어있다. 

Times Square 북쪽 끝. 가운데 검은 색 동상이 Father Duffy 동상이고 그 뒤가 TKTS 빌딩 위에 앉아있는 사람들





 

내가 처음 뉴욕에 왔을 (1986) 만 해도 타임스퀘어 주변은 지저분하고 위험한 지역이었다.  포르노 극장과 포르노 잡지와 비디오를 파는 가게 그리고 핍쇼를 하는 가게들이 줄을 지어 있었다. 핍쇼란 동전을 넣으면 열리는 조그만 구멍을 통해 나체쇼를 보는 것이다. 19 세기에도 이곳은 홍등가로 유명했다고 한다. 당시에 내가 Times Square 쪽으로 구경 간다고 하자 5 짜리를 뒷주머니에 넣고 가라고 조언을 주는 사람도 있었다. 노상 강도들이 많은데 빨리 5 짜리를 건네 주면 그냥 보내준다는 것이다. 물론 좀 과장된 경고였겠지만 베트맨 영화에 나오는 어둡고  위험한 Gotham City 거리의 장면들이 바로 당시 42 주변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타임스퀘어는 안전하다. 밤에도 주말엔 관광객들이 가득차 있어 걸어가기 힘들 정도이다. 노상 강도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테러리스트는 모르겠지만.

 



 타임스퀘어 빌딩 (One Time Square) 보면 연상되는 건물이 다리미” (Flatiron)빌딩 이다. Flatiron  빌딩도 맨해튼을 사선으로 가로지르는 브로드웨이와 5th Ave 23 street 에서 X 자로 만나 생긴 삼각형 공간에 치즈 케잌 조각처럼 만든 건물로서 뉴욕서 가장 사진이 많이 찍히는 건물이다. 타임스퀘어 빌딩은 그러나 완전한 삼각형은 아니고 뾰족한 모서리가 잘려 나간 사다리 꼴이다. Flatiron 빌딩도 광고판을 단적이 있는데 주변 거주자들이 반대해 철거했다고 한다.

By Imelenchon (original work) - This is a retouched picture, which means that it has been digitally altered from its original version. Modifications: cropped. The original can be viewed here: Edificio Fuller (Flatiron) en 2010 desde el Empire State.jpg. Modifications made by Beyond My Ken., Public Domain, https://commons.wikimedia.org/w/index.php?curid=127620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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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역사 기행 - 맨해튼 2  (0) 2018.04.08
Posted by krkim

그리니치 빌리지 바로 14 street 부터 Central Park 시작하는 59 street 까지 Midtown 이라 부른다.  (34 street 북쪽부터 미드타운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지역에서 사람들이 많이 찾는 관광지는 Times Square, Rockefeller Center, Empire State Building, Chelsea, Koreatown 등이 있다. 남쪽부터 시작해서 15 서쪽 (9th Ave) Chelsea Market 원래는 과자 만드는 공장이었는데 (NABISCO) 지금은 관광지가 되었다. 특별히 있는 것은 아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건물에 식당, 빵집 옷가게 등이 . Highline Park (고가도로 공원)  올라가는 입구도 바로 붙어 있다. 2018 년에 구글이 첼시마켓 빌딩을 24 억달러에 샀다는데 단일 빌딩으로 뉴욕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건물이라 한다. Empire State Building 보다 비싼 가격이라던데 별볼일 없어 보이는 건물이 그렇게 비싼 몰랐다. 재개발 하려고 그러는지.

 

Chelsea market 은 여러번 갔는데 쓸만한 사진이 없다.


Broadway 5th Ave 사이의 32 가를 Koreatown 이라고 한다. 주말에 가면 한국식 빵집 (뚜레쥬르) 앉을 자리가 없고 갈비집  같은 식당 앞에는 사람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는 것을 쉽게 있다. 이상이 한국 사람이 아니다. 코리아타운이 시작된 것은 70년대 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80 중반만 해도 32 가가 그렇게 인기가 있지 않았고 한국 식당에 가려면 36 가로 가곤 했던 기억이 있다. 80년대 뉴욕에선 일식 (스시) 먹는 것이 유행이었고 일제 가전 제품 (SONY) 가장 인기 있었는데 요샌 한국 전자 제품이 가장 인기가 있고 한국 음식이 유행이다. 아들도 맵다고 먹는 떡볶이를 아들 룸메이트 (